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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 옆 미술관… 추억과 예술을 품고 사는 동네

입력
2015.04.0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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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부동산 광풍에 예술인ㆍ주민 손잡고 '문화 선언'

옛 건물과 현대 미술 문화가 공존… "단순한 관광 마을 아닌 교류의 장"

한국사회를 성장시켜온 ‘속도’와 ‘효율’이란 명제가 유독 맥을 못 추는 마을이 있다. 이름도 재미난 인천 동구의 배다리마을이 그 곳이다.

1883년 개항 이후 제물포 해안에 개항장이 들어서면서 제물포 등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배다리마을은 늘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었다. 하지만 1970,80년 대를 지나면서 하나 둘 생겨난 신도심에 밀려 활기를 잃었다.

배다리마을이 다시 주목 받기 시작한 건 1998년부터 추진된 마을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구-동구 산업도로 공사 때문이었다. 배다리마을에 있는 대안적 미술 활동 공간 ‘스페이스 빔’ 민운기 대표는 “송도와 청라경제자유구역, 나아가 개성공단으로 이어지는 남북간 흐름을 위해 계획된 산업도로는 배다리마을을 그저 지날 뿐이었다”며 “역사와 문화, 주민들의 생활생태계가 파괴됨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고 기억했다.

부동산 개발 광풍도 배다리마을을 덮쳤다. 전면 철거 방식의 공영개발사업인 동인천역 주변 재정비촉진사업 대상지에 배다리마을이 포함된 것이다.

주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시민문화예술단체와 활동가들도 나섰다. 산업도로 건설과 개발 반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배다리마을 지키기와 함께 가꾸기도 시작했다. 재정비촉진사업이 본격화된 2007년쯤부터 모여든 문화예술인과 주민들은 2009년부터 문화예술과 역사를 결합한 사업들을 활발히 펼쳤다. ‘배다리 문화 선언’ 선포, 공공미술프로젝트 ‘마을 벽화 그리기’, 역사탐방, 헌책방거리 보존, 산업도로 예정 부지 텃밭 가꾸기, 배다리 문화축전 등이다. 자연스레 배다리마을은 기존 근대 문화재와 문화예술공간이 어우러진 곳이 됐다.

배다리마을은 경인선 동인천역에서 도원역을 가다 보면 나오는 철교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다.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이 통합돼 만들어진 금창동 지역이다. ‘배다리’는 사전적으로 ‘배를 한 줄로 여러 척 띄워 놓고 그 위에 널빤지를 건너질러 깐 다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배다리마을 지명은 ‘배가 닿는 마을’로 해석된다. 인근 송현초와 중앙시장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대는 다리가 있어 ‘배다리’라 불렀다고 한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설립한 성냥공장 등이 들어서고 1899년 경인선이 개통하면서 배다리마을 일대에는 조선인들이 몰려 들었다. 이곳은 서울을 오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사람이 몰리자 장터가 생기고 양조장도 들어섰다. 배다리시장의 명맥은 현재 중앙시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배다리마을은 근대교육의 발상지로 볼 수 있다.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의 구교사(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6호)와 서구식 신식교육의 선구지로 꼽히는 영화학당부터 이어져온 영화초 본관동(제39호)이 배다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창영초는 순수민족자본이 투입돼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로 설립됐으며 3·1운동 당시 인천 만세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영화초의 전신인 영화학당은 1892년 존스 목사 부부에 의해 설립됐다.

배다리마을에는 1894년에 지어진 독특한 북유럽 양식의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제18호)도 있다. 처음에 미국 감리교회가 보낸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이용되다 해방 후 인천기독교사회관, 1956년부터는 여자 선교사들의 숙소로 쓰였으며 이후 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사용됐다.

배다리마을의 또 다른 상징인 헌책방거리는 1950,60년대를 거쳐 형성됐다. 시작은 헌책을 길바닥에 늘어놓고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헌책방거리는 1970,80년대 40곳이 넘는 헌책방이 생겼을 만큼 번성했지만 1990년 대부터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었다. 현재는 헌책방거리의 터줏대감 아벨서점 등 헌책방 6곳 정도가 남아 거리를 지키고 있다. 대하소설 ‘토지(土地)’를 쓴 소설가 박경리 선생도 젊은 시절 이곳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다고 한다.

배다리마을에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면서 다양한 공간도 생겨났다. 옛 인천양조장 건물에는 다양한 생활문화 창작활동과 함께 배다리 가꾸기의 중심이 되고 있는 스페이스빔이 들어섰고 곽현숙 아벨서점 대표가 자료 전시와 시낭송회 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아벨전시관도 문을 열었다. 인천 최초의 사진 전문 갤러리를 표방한 ‘사진공간 배다리’, 한점갤러리 등 작은 갤러리, 미술관, 공방도 하나 둘씩 생겼다. 최근에는 헌책방거리 인근에 요일마다 주인이 바뀌는 ‘요일가게 다(多) 괜찮아’가 문을 열었다. 카페와 액세서리 가게 등이 3개월씩 임대계약을 체결해 정해진 요일마다 문을 여는 곳이다. ‘가게 안의 가게’ 콘셉트도 접목해 한 가게에서 다양한 물건과 서비스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2013년에는 배다리 안내책자인 ‘배다리갈래’와 ‘배다리역사문화마을지도’도 출간됐다. 배다리갈래는 ‘배다리’와 ‘갈래’의 합성어로 배다리마을 안내 인터넷 카페(http://cafe.naver.com/welcometobaedari) 이름이기도 하다.

민 대표는 “(배다리마을 가꾸기는) 속도와 효율이 횡횡하고 있는 현실, 역사성과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개발에 대한 작은 저항이었다”며 “도시재생, 관광 활성화 등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가치와 삶의 방향을 만드는 출발지가 배다리마을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관광 활성화라는 목적 아래 시설물을 설치하고 벽화를 그려 이색적이고 재미있고 추억이 있는 마을을 만드는 것보다는 배다리마을이 지닌 가치에 대해 공감하고 이곳 사람들과 교류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찾는 곳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고 말했다.

배다리마을 인근에는 배다리시장의 후신인 중앙시장과 배다리 지하상가에 있는 배다리전통공예상가, 재개발로 사라진 수도국산의 1960,70년대 모습을 엿보고 체험할 수 있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등이 있다. 전국에서 유명한 달동네였던 송현동 옛 모습을 재현해 놓은 달동네 박물관 건립은 당시 “좋지 못한 기억을 왜 끄집어 내냐”는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고 한다.

헌책방거리와 함께 배다리마을을 지탱하는 문구?완구?팬시 도매점들도 마을 곳곳에 들어서 있다. 배다리 명물로 자리잡은 개코막걸리와 평양냉면, ‘세숫대야 냉면’으로 유명한 화평동 냉면거리, 송현동 순대거리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중앙시장에서 헌책장거리로 들어서는 입구 옛 조흥상회 건물 1층에는 배다리안내소가 있다. 문화예술인들의 공동 참여로 운영되는 무인안내소이다. 안내지도를 구하거나 잠시 쉬면서 차를 마실 수 있다.

이환직기자 slamh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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