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추사연구가, ‘삼국지’ 번역자로 유명한 김구용 선생과 그 일행이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에서 강진의 향토사학자 등을 만날 때의 이야기이다. 김구용 선생이 돌아가신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으니 꽤 오래되었다. 선생은 그때 강진 분들에게 “다산의 작은 부인”에 대하여 물어 주위를 경악시켰다고 한다. 평소 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문학서”라고 말씀하시던 분이니 이런 물음이 자연스럽다. 도덕이라는 이름의 거추장스런 겉치레, 위선 등을 혐오한 당신이기에 이런 거침없는 질문이 가능했나 보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될 때의 나이가 40이니 아무리 조선시대라고 해도 중년이다. 중년 남성이 홀로 외딴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려웠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이 물음이 강진의 관계자들과 향토사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지는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강진에서의 다산이야말로 거의 신적인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그의 위상에 작은 흠결이라도 생길 것 같은 이런 불경스런(?) 물음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한참 후에 강진의 한 분께서 다산의 작은 부인-그러니까 강진댁이라고 할지 모르겠다-에 대한 기록을 찾아내어 김구용 선생께 전하였고 이 내용을 김구용 선생 또는 그 후학들이 세상에 알렸다고 기억한다. 결론적으로 이 일을 통해 다산의 인간적인 모습이 부각되지 않았을까 싶다.
다산의 작은 부인을 떠올리면 청마 유치환 시인이 연상되곤 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잠언과도 같은 가르침, 이 구절 때문에 문학소년 문학소녀들은 얼마나 고마워하고 또 얼마나 위안을 받았는가. 그런가 하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라는 절창은 폭풍처럼 가슴을 후빈다. 실로 깊은 사색과 사유를 거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격조 높은 어휘요 경지이다. 감성적이되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러면서도 남성적 풍모를 잃지 않는 역동적 느낌이야말로 청마의 시가 주는 감동이 아닐까. 청마의 시를 탄생하게 한 정운 이영도 시인에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유명하다. 두 사람의 관계야말로 보통사람들은 생각하기조차 힘든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청마의 부인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함정이다. 청마와 정운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시인으로서는 물론이요 교육자로서의 청마 역시 훌륭한 모습을 보였고 가장으로서 가정을 등한히 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 다만 청마의 부인이 누구인지 그 분의 심정은 어땠는지에 대한 글은 한 번도 본 적 없고 들은 적도 없다는 근원적 의문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부인에게도 정운에게처럼 충실했거나 실은 부인에게 더욱 살가웠지만 그 사실이 잘 안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청마야말로 우리 같은 보통사람으로는 측량할 길이 없는 ‘능력자’가 아닐 수 없다. 이 경우라면 청마의 부인은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량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크다. 남성의 장례식장 한 구석에 소복 입은 이름 모를 여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울고 있지 않으면 풍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는 우리 윗세대의 우스개도 있으니 그 시절 남자들의 객기란 그만큼 대단했기에 오해만 많아졌나 보다.
얼핏 작아 보여도 본질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중국 고대의 도가서 ‘회남자’에서 “끓고 있는 가마솥의 간을 보기 위해서는 가마솥 전체를 마실 필요가 없다. 한 국자의 국물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어떤 사건이건 본질을 파악하고 헤아리기 위해서는 많은 물음과 답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작은 한 가지 예로 내용을 꿰뚫을 경우도 있고 핵심이 드러날 단면을 엿볼 수도 있다. 그렇게 드러난 내용을 자신의 옹졸한 해석으로 그릇된 결과를 초래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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