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과거의 경험을 높이 산 사회였다. 그래서 중추부(中樞府)를 두었는데 의정부와 같은 정1품 아문(衙門)이지만 맡은 직책은 없는 관아였다. 정1품의 영사(領事) 한 명과 종1품의 판사(判事) 2명, 정2품의 지사(知事) 6명 등으로 구성되는데, 정승을 역임한 사람만이 영사가 될 수 있었다.
판사는 정2품 판서 역임자도 가능했지만 이조판서를 뜻하는 총재(?宰)와 예조판서를 뜻하는 종백(宗伯), 병조판서를 뜻하는 사마(司馬)만이 판서에 보임될 수 있었다. 문무관의 인사권이 있었던 이조·병조판서와 나라의 예법을 총괄하는 예조판서의 경력을 높이 쳐준 것이었다. 맡은 직임은 없었지만 녹봉은 지급했으니 일종의 전관예우였다.
고위 벼슬아치들 중에는 가난한 선비들도 없지 않았다. 세종 때 우의정을 역임한 유관(柳寬ㆍ1346~1433)이 대표적인데, 장맛비가 내려서 지붕이 새자 우산을 펼치고는 부인에게 “이 우산도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디겠소”라고 말해서 부인이 “우산 없는 집은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라고 받아 쳤다는 이야기가 ‘필원잡기’에 전한다. 태조부터 세종까지 네 임금을 섬겼지만 늘 가난했는데, ‘세종실록’ 8년(1426) 1월조는 ‘우의정으로 치사(致仕ㆍ나이가 많아 물러남)한 유관의 녹봉을 제4과(第四科)에 의해 내려주라’고 명했다고 전한다. 정1품 정승으로 치사하면 정3품 5과에 해당하는 녹봉을 주는데, 한 과 높여서 종2품 제4과의 녹봉을 주게 한 것이었다. 평생을 공직에 헌신한 노신들에게 일종의 연금을 지급한 것인데, 태종 7년(1407)에 정한 백관의 녹봉 등급에 따르면 정승 출신이 받는 제5과는 녹미(祿米) 70석 등인데 제1과는 녹미 100석 등이니 현직의 약 70% 정도를 연금으로 주는 셈이었다.
조선에서 죽을 때까지 현직 대접을 받은 인물이 ‘직업이 정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황희(黃喜ㆍ1363~1452)였다. 세종 8년(1426) 우의정에 임명된 황희는 만 예순여덟의 고령이던 세종 13년(1431)에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황희는 여러 차례 사임했지만 세종은 그가 만 여든여섯이 되는 재위 31년(1449)에야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것도 그냥 퇴직시키지 않고 영의정을 그대로 역임하게 하면서 하연(河演)을 동시에 영의정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두 명의 현직 영의정이 있던 시기였는데 다만 조정에는 나오지 말고 국가 대사만 조언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두 명의 현직 영의정 체제에 대해 시비가 없었던 것은 노대신의 존재 자체를 나라의 기둥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종 즉위년(1450) 9월 의정부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 때 ‘문종실록’은 “황희의 자리가 영의정 하연의 위에 있었다”고 말한 것처럼 둘 다 출근하면 황희가 상석이었다.
그런데 세조는 재위 3년(1457) 7월 봉조청(奉朝請)을 설치해 관직이 없는 공신과 종친들에게 녹봉(祿俸)을 준 것은 경우가 달랐다. 한 해 전의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위기를 느낀 세조가 쿠데타 동지들과 종친들을 결속시키기 위해 준 일종의 뇌물이었다. 세조는 한 술 더 떠서 재위 10년(1464)에는 봉조청을 봉조하(奉朝賀)로 개정하는데, ‘청(請)’자는 조정에서 청하면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지만 ‘하(賀)’자는 조정 의식에만 참여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봉조하는 정조(正朝)·동지(冬至)·탄일(誕日) 등의 하례의식에만 참석하고 평생 녹봉을 받았다.
현재 한국 공직사회 일부의 음성적 관행인 전관예우는 일본 왕실의 법이었다. 일제 대정(大正) 15년(1926) 10월 개정된 황실의제령(皇室儀制令) 제31조 ‘대신의 예우와 전관예우 하사’에 관한 조항이 그것이다. 일본 사전들은 “국무대신(國務大臣)·추밀원의장·궁내대신(宮內大臣)·내대신(內大臣) 등 공로가 있는 자들에 대해 퇴직 후에도 재직 때와 비슷한 예우를 하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최근 대한변협이 한 전직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신청 철회를 권고한 것이 화제다. 그간 대법관 출신이 개업하면 3년에 100억씩 번다는 말이 떠돌아다니며 사법부의 신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대법관 퇴직 후 받는 연금이 조선에서 퇴직 고관들에게 주었던 녹봉보다 얼마나 적은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그런 전관예우는 끊을 때가 되었다. 퇴직 후 시내 변두리의 허름한 사무실을 얻어 서민들에게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는 것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전관이 등장할 때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높아질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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