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교통사고로 뇌수술
가수 꿈 접고 래퍼로 긴 무명 터널
죽음 문턱까지 간 경험… '코마 07'로 토해 내
깊은 인상 주려 진한 화장
실제론 방송처럼 무섭지 않대요
2007년 1월 가수를 꿈꾸던 17세 소녀가 쓰러졌다. 건널목을 걷다 버스에 치인 것이다. 음악을 하기 위해 부산에서 고교를 자퇴하고 서울로 온 김은영. 전두엽에 피가 고여 수술이 시급했다. 선택은 2가지. 살아날 확률은 희박하지만 완치 가능성이 높은 인공뇌사 수술과 생존 가능성은 높지만 장애를 피할 수 없는 뇌 절제 수술. 딸의 행복을 위해 고교 중퇴에 출가까지 허락했던 부모는 위험을 무릅쓰고 인공뇌사를 택했다. 오로지 딸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8년 뒤 소녀는 랩스타가 됐다. 사고 후유증으로 가수의 꿈을 접고 래퍼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지 6년 만이다. 무슨 일이든 딸을 응원하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어머니는 딸이 기나긴 무명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것을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던 경험을 랩(‘코마 07’)으로 토해내는 걸 지켜보면서. 26일 종영한 케이블채널 엠넷의 여성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 ‘언프리티 랩스타’의 최종회 승자인 치타(25) 이야기다.
30일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만난 치타는 예상보다 작은 체구에 TV 화면보다 훨씬 밝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방송에서 본 것만큼 무섭지 않다고. 일부러 무섭게 보이려 한 건 아니었어요. 첫 촬영할 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속눈썹을 붙이고 화장을 진하게 했는데 그게 제 캐릭터가 된 것 같아요.”
치타의 무명 시절은 고달팠다. ‘앨범 내고-망하고-쉬고’의 사인곡선이 이어졌다. 2010년 여성 듀오 블랙리스트로 데뷔했는데 하필 비슷한 시기에 방송인 김미화의 ‘블랙리스트’ 사건이 터져 조용히 묻혔다. 한참을 쉬었다. 2년 뒤 래퍼 크러쉬와 마스터피스라는 팀을 만들었으나 소속사와 계약이 종료되면서 또 흐지부지됐다. 같은 해 ‘쇼미더머니’에 출연해 주목을 받았지만 남성 래퍼들에 밀려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별 수 없이 또 쉬었다. 절치부심 끝에 새 기획사와 계약하고 1년여 넘게 준비한 끝에 지난해 미니앨범(EP) ‘치타 잇셀프’를 냈다. 역시 별 반응은 없었다. 하릴없이 쉬었다.
그러던 차에 ‘언프리티 랩스타’ 작가의 전화를 받았다.
“고민도 안 하고 하겠다고 했어요. 주저 없이 결정한 건 저 혼자뿐일 걸요. 이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거죠. 제겐 마지막이었어요.”
치타는 “예상치 못한 제 표정이 TV에 잡힐 때마다 민망했다”며 촬영을 후회했다지만 방송 초부터 두드러졌다. 가사의 구성이나 라임(각운), 플로(리듬을 타고 이어지는 가사의 흐름)가 매번 호평을 받았다. 그런 실력은 당연하지만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가사를 썼고 플로를 만들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제2의 누군가가 되지 않겠다면 롤모델도 정하지 않은 치타는 누구와 맞붙어도 주눅들지 않았다.
하지만 연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각’이라고 그는 말한다. “직업병처럼 일상에서 가사와 라임의 소재를 찾아요. 늘 머릿속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곡을 만들죠. 연습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건 아니고 곡을 쓸 때마다 연습하면서 만듭니다. 전부 다 완곡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수백 곡을 쓴 것 같아요.”
스물 다섯답지 않은 완숙미는 어쩌면 일찌감치 방황을 겪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노래가 어려워진 후 그는 한참을 방황했다. 삶의 이유가 음악인 사람에겐 사형선고였다. 재활하는 동안 오디션을 봤고 어떻게든 음악을 해보고 싶어 이것 저것 모든 장르를 불렀다. “기획사 사장님이 ‘노래는 지금 힘들 것 같다’며 랩을 해보라고 권유하셨어요. 그때 심정은 ‘유레카!’였죠.”
치타는 가요에 힙합을 토핑처럼 얹은 음악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낸 앨범처럼 앞으로도 노래가 아닌 랩 위주의 곡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5월 말쯤엔 싱글이나 미니앨범(EP)를 낼 계획이다. 치타가 추구하는 힙합은 무엇인지 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힙합을 하고 싶어요. 좋은 영향이면 좋겠고요.”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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