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웨이’ 실패 후 4년 만에 복귀
"대작 만들 때 시너지 효과 기대"
거침 없는 영화인생이었다. 데뷔작 ‘은행나무침대’(1996)의 흥행 성공으로 무서운 신인 대우를 받았다. ‘쉬리’(1999)로 흥행의 신기원을 세웠고 한국형 블록버스터 모형을 제시했다. ‘태극기 휘날리며’(2003)로 ‘실미도’와 함께 1,000만 영화 시대를 열었다. 강우석 감독과 함께 ‘양강체제’로 충무로를 이끌었다.
장애 없이 내달리던 흥행 질주는 ‘마이웨이’(2011)로 거꾸러졌다. 제작비 300억원을 들인 블록버스터 중의 블록버스터였으나 214만명가량만이 찾았다. 단 한번의 흥행 실패가 ‘대작 전문’ 감독에게는 유독 잔인하게 작용했다. 과연 어떤 작품으로 어떻게 재기를 모색할 것인가? 최근 충무로에서 강제규 감독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따라 붙는 의문이었다.
강 감독의 복귀작 ‘장수상회’(4월9일 개봉)는 여러모로 대중의 예상을 깬다. 서울 변두리를 배경으로 노년의 사랑을 다룬다. 소시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며 감동과 웃음을 전하려 한다. 실버 스타 박근형과 윤여정을 앞세웠다. 신현준 한석규 장동건 등 당대 최고의 스타를 기용하곤 했던 그의 이력과 대치된다. 변신인가? 모색인가? 현실적응인가? 물음표를 잔뜩 지닌 채 지난 27일 오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강 감독을 만났다.
“예전엔 장르적 압박, 영화 규모와 흥행에 대한 부담에 시달렸다. 완전군장하고 마라톤을 달리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군복을 입고 인적 없는 곳에서 촬영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 내가 발을 붙인 곳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완전군장을 벗어 던지고 간편한 운동복을 입은 채 편안하게 뛰고 싶다는 욕망이 굉장히 강했던 것 같다.”
‘장수상회’는 강 감독 작품 중 예외적으로 총 칼 등의 무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당연히 피비린내도 없다. 강 감독은 “사람들과 살갑게 부딪히며 작업하고 싶은 욕망이 컸다”고 했다. “이전 영화들은 ‘감독님, 이 총 어떠세요’ ‘이 장비 어떠세요’라는 질문에 대처하느라 연기자와 눈을 맞대고 인물을 밀도 있게 그리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28분짜리 단편 ‘민우씨 오는 날’을 만들며 욕망을 달랬다. 단편에 대한 평가가 좋았는지 ‘장수상회’ 연출 의뢰가 들어왔다. “나의 아버지, 나의 가족 이야기 같아 시나리오에 호감이 갔다.” 미국에 있는 아내(탤런트 박성미)에게 전화했다. “흥행과 아무 관련 없는 영화, 손익분기점만 맞춰도 다행일 영화인데 괜찮을까”라고 물었다. 결국 “흥행에 대한 마음을 비우고” 영화를 찍었다.
사실 로맨스는 강 감독의 장기다. ‘은행나무침대’는 시간을 뛰어넘은 세 남녀의 애절한 삼각관계를 축으로 액션과 판타지를 제공한다. ‘쉬리’는 남북문제로 포장한 두 남녀의 신파성 멜로라는 평까지 받았다. 강 감독은 선 굵은 장면 연출에만 능한 것으로 여겨지나 남녀가 주고 받는 섬세한 감정 묘사에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왔다.
‘장수상회’의 상당부분은 웃음에 기댄다. 배우들의 포진에서 웃음에 대한 욕구가 느껴진다. 코믹 연기에도 일가견이 있는 조진웅이 마트 사장으로 등장하고, 감초 전문 김정태가 수다스러운 세탁소 주인을 연기한다. 동네 중국집 이름은 ‘철가방 휘날리며’다. 자신의 최고 흥행작(‘태극기 휘날리며’)을 우스개 대상으로 삼았다. 영화 ‘써니’(2011)를 패러디한 장면도 등장한다. 웃음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강 감독이 코미디라니.
“텔레비전 개그프로그램은 다시보기를 통해서라도 꼭 본다. 코미디영화를 잘 만들 자신은 없지만 ‘행오버’ 같은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영화의 주요 본질 중 하나가 사람을 웃기는 거다. 코미디영화를 만들 엄두는 안 났으나 평범한 동네에 있을 만한 사람들의 생활 속 웃음을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강 감독의 ‘부드러운 영화’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강 감독은 “몸은 고달파도 장르영화가 가진 매력과 쾌감은 여전히 내게 중요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장수상회’ 같은 영화를 병행하면 성숙과 성장이 깃든 블록버스터가 나오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대작 장르영화만 하다 보니 작은 영화가 지닌 소중함을 놓쳐왔다. 사람의 내면에 집중하는 영화를 하다보면 대작을 만들 때도 시너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영화를 하면서 체득한 성숙한 시선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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