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지성 갖춘 지주의 딸
10대 때부터 헤밍웨이 등과 함께 트로피카나 클럽의 유명인사로
좌파 사회주의 단체에도 참여
혁명가 조력자서 연인으로
남편과 함께 자금·장소 제공
카스트로와 옥중 편지로 애정
조국과 사랑, 끝내 지키다
옛사랑 카스트로는 변심했지만
혁명 정부서 은퇴 때까지 일해
2월 28일 작고한 나탈리아 레부엘타는 ‘쿠바의 연인’ 혹은 ‘카스트로의 여인’으로 한국에도 꽤 알려진 인물이다. 내티(Nati, 레부엘타의 애칭)는 언론과 몇 차례 인터뷰를 했고, 그를 중심으로 3대의 인생 역정을 쿠바 현대사와 함께 엮은 <아바나 드림>(Wendy Gimbel, 1993년) 같은 책도 있다.
미모와 교양, 재력을 지닌 쿠바의 명사로 젊은 시절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을 도왔고, 그와 사랑에 빠져 딸을 낳은 뒤 남편과 이혼하고 카스트로에게도 배신당한 여인. 훗날 딸은 미국으로 망명해 친부의 독재와 쿠바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했지만 그는 쿠바에 남아 혁명 이념의 비극적인 훼손을 견디면서 고독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는 삶의 주인공으로서 조명되기보다 카스트로의 에피소드로, 또 혁명 전후 쿠바 현실을 대비하는 극적인 상징으로 활용되곤 했다. 한마디로 그는 59년 쿠바 혁명과 62년 쿠바 미사일위기 이후, 미국과 서방의 소위 ‘안티(Anti) 카스트로 산업’의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그의 삶을 비극적이라 한다면 개인적 삶 자체의 질곡 때문이 아니라 혁명가의 스캔들 혹은 혁명의 좌절과 타락을 부각하기 위한 삽화의 소재로 끌려 다녔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내티는 비록 짧았지만 헌신적이었던 자신의 사랑을,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고 매정한 연인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숨을 거둘 때까지 자신의 조국과 그가 사랑했던 쿠바의 인민들에게 등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지켰고 쿠바의 혁명을 지지했다.
나탈리아 레부엘타 클레우스(Natalia Revulta Clews)는 1925년 12월 6일 쿠바의 한 지주 집안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2003년 마이애미 헤럴드 인터뷰에서 내티는 자신의 유년을 힘든 나날이었다고 했지만, 그를 힘들게 한 것은 정서적 문제였던 듯하다. 그는 혁명 전까지 ‘가난’을 몰랐다. 부모의 이혼으로 유년을 어머니 도나 나티카(Dona Natica)와 함께 외가에서 살았지만, 외가 역시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10살이던 35년 어머니 나티카는 미국 기업이던 아바나 전기회사 임원과 재혼했다. <아바나 드림>은 나티카를 구체제의 맹렬한 신봉자로 그렸다.(NYT 북리뷰, 1998. 7.5) 혁명 이후 토지를 비롯한 부유층의 사유재산이 국유화된 뒤로도 나티카는 은식기로만 식사하던 화려한 과거가 부활하리란 기대를 고집스레 지켰고, 자신의 망상이 현실에서 배반당하고 기대가 아득히 멀어 보일 때마다 솟구치는 울분을 아무에게나 터뜨리곤 했다고 한다.
레부엘타는 좋은 교육을 받으며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했다. 특권층 아이들이 다니던 아바나의 미국인 사립학교(러스턴 아카데미, 마운틴 성 조셉 아카데미)를 거쳐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가톨릭여학교를 졸업했고, 워싱턴의 머조리 웹스터 칼리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19살 무렵 돌아온 그는 아바나 미국 대사관과 에쏘(Esso) 스탠더드 오일 쿠바 지사에서 일했다.
레부엘타는 도드라진 미인이었다. 22살의 그가 스무 살 연상의 심장병 전문의(오를란도 페르난데스)와 결혼한 배경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것이 돈이나 명성, 지위 등과 관련된 세속적 타산에 이끌린 건 아닌 듯하다. 그에겐 결혼으로 채워야 할 만큼 절실한 결핍이 없었다.
쿠바의 50년대를 설명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아바나 트로피카나 클럽의 단골 고객이거나 연주자들, 예컨대 말론 브란도 어니스트 헤밍웨이 리타 헤이워스 넷킹콜 등과 함께 그는 10대 말부터 클럽의 명성을 돋우는 유명인사였고, 영화배우 에드워드 로빈슨, 에럴 플린 등과 친구처럼 어울렸다. 2011년 ‘Vanity Fair’인터뷰에서 레부엘타는 “18살 때부터 카바레 입장이 허용됐는데, 그 전에는 아바나 컨트리클럽에서 브리지나 테니스, 때로는 요트를 타곤 했다. 그곳은 쿠바 상류층 커뮤니티의 사교무대였는데, 적어도 그 곳만큼은 바티스타(1940년과 52년 쿠데타로 집권한 쿠바의 전 대통령)의 사람들도 껴들지 못했다”고 했다. 커뮤니티의 멤버십은 한때의 부나 지위가 아니라 그가 누구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혹은 딸)인지로 판별됐다. 그의 사교활동은 결혼 이후, 또 첫 딸 니나를 낳은 뒤로도 이어졌다. “하루는 바에서 한 친구가 헤밍웨이의 청으로 나를 초대하더군요. 갔더니 헤밍웨이가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내가 그의 고양이를 연상시킨다고 하더군요. 뭔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당신의 눈, 눈동자가 그래요. 물론 찬사입니다’라고 말했어요.”(Vanity Fair, 2011.9) 피델 카스트로의 전기 <Guerrilla Prince>(1991)를 쓴 조지 게이어(Georgie Geyer)는 레부엘타를 이렇게 썼다. “금발에 초록빛 눈, 풍만한 가슴, 그리고 언제나 생동감 넘치는 영혼. 내티는 방에 들어서는 순간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고 말문을 닫게 하는 그런 여인이었다.”(Daily Mail Online, 15.3.2)
레부엘타의 삶과 달리 혁명 전 쿠바의 실상은 바티스타 쿠데타 이전에도, 집권 이후에도 암담했다. 토지는 미국 자본과 대지주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고, 친미 권력의 부패도 극에 달했다. “나라 사정은 끔찍했어요. 대통령서부터 맨 아래까지 공무원들은 도둑질에 여념이 없었고, 장관이 부자가 되면 비서들도 따라 부자가 됐죠. 경찰은 유니폼을 입은 살인자였고요. 매일 누군가가 고문당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그들의 시체는 길가에 내팽개쳐지거나 상어 먹이로 바다에 던져지곤 했어요. 그래서 그들을 돕기 시작했던 겁니다.”레부엘타는 하지만, 카스트로를 만나기 전부터 대중적 좌파 민족ㆍ사회주의 단체였던 ‘인민정통파(Orthodox Party)’활동에 직간접적으로 발을 담그고 있었다. 레부엘타와 카스트로는 52년 한 친구의 주선으로 만나게 되지만, 레부엘타는 카스트로를 인민정통파 회합에서 이미 얼굴을 봤고, 카스트로는 학생 시위 현장에서 레부엘타를 본 뒤 지인에게 소개를 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워싱턴 포스트, 15.3.3)
레부엘타의 집에서 이루어진 첫 만남에는 남편 페르난데스도 합석했다.“우리는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자신의 전망에 열정적이었고, 자금과 무기를 도와줄 사람을 간절히 구하고 있었다. 내 남편은 존경 받는 의사로 돈을 잘 벌었고, 나 역시 풍족한 급여(당시 정유회사)를 받던 때였다.” 그와 남편은 따로 카스트로에게 자금을 건넨다. 그날 그가 준 돈이 자신의 저축액 전액(6,000 페소)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귀걸이, 금팔찌 등 패물도 저당 잡혀 그를 도왔어요. 피델과 그의 사람들은 우리 집을 안가처럼 활용하며 비밀 회합을 갖곤 했는데, 그들은 나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나 역시 그랬어요.”(VF)
쿠바 혁명의 시발점인 53년 7월 26일의 몬카다 병영 습격 ‘작전 사령부’도 레부엘타의 집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다만 혁명 발발과 동시에 선언문 등을 쿠바의 유력 정치집단과 주요 언론에 배포한 게 레부엘타였던 건 분명한데, 그는 초기 혁명군의 선전역으로서 거의 모든 작전 정보를 공유했다. 하지만 습격은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실패로 끝났고, 카스트로는 15년 형(동생 라울은 13년 형)을 받고 피노스섬 프레시디오 모델로 감옥에 투옥된다. 레부엘타는 처벌을 면했는데, 그 배경 역시 알려진 바 없다.
둘의 동지적 신뢰가 애정으로 바뀐 것은 카스트로가 투옥된 뒤부터 쿠바를 떠나는 조건의 특사로 풀려난 55년까지 약 2년간 나눈 편지를 통해서였다. 둘은 철학과 문학, 쿠바 현실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교환했다. 레부엘타는 편지 속에 코파카바나 해변의 모래나 콘서트 프로그램, 포크댄서들의 공연 사진 등을 동봉, 바깥 세상의 근황을 알리고, 도스토예프스키 프로이트 빅토르 위고의 책을 자신의 사진이나 로맨틱한 구절들과 함께 보내기도 했다. 그는 99년 2월 ‘유에스뉴스 & 월드리포트’인터뷰에서 “그의 코가 그리스풍이어서, 댄서들의 사진은 그를 떠오르게 했어요. 난 사진과 함께 이렇게 적어 보냈죠. ‘당신이 거기 있었어요. 나는 당신이 춤추는 걸 봤답니다.’”
카스트로는 한 편지에서 “책에서 찾은 모든 기쁨을 당신과 나누고 싶다”고 썼다. 편지를 자주 보내지 않고 자필로 쓰지 않는 것을 불평하는 대목도 있다. “충족될 수 없는 꿀 같은 맛이 있어요. 그게 당신의 편지가 지닌 비밀입니다. 난 당신에게 여러 차례 타이프라이터 대신 손으로 써달라고 청했는데…. 나는 섬세하고 여성스럽고 또 완벽한 당신의 필체를 사랑합니다.”(54년 1월 31일 카스트로의 편지) “나는 지금 불타오르고 있어요(I’m on fire). 내게 편지를 보내줘요. 당신의 편지 없이는 견딜 수 없습니다. 당신을 무척 사랑합니다.”(55년 1월 9일 편지, 유에스뉴스 & 월드리포트)
카스트로의 편지 가운데 한 통이 카스트로의 아내(Mirta Diaz Balart)에게 배달되는 바람에 카스트로 출옥 후 이혼하게 된 사실은 유명한데 어떤 경위로 배달 사고가 일어났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둘의 편지는 93년 미국으로 망명한 딸 알리나와 웬디 김벨의 책 등을 통해 공개됐다. 하지만 그것들은 둘이 나눈 편지의 일부일 뿐인데, 청년 카스트로의 전기를 집필하며 레부엘타를 수 차례 인터뷰한 하버드대 역사학자 조나단 한센에 따르면 카스트로가 레부엘타에게 쓴 옥중 편지만 약 40여 통에 달한다.(NYT, 05.3.4) 99년 인터뷰에서 레부엘타는 “피델이 숨지기 전에는 편지를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생활을 중시하는 사람이고, 그의 프라이버시 역시 존중한다. 나는 우리 이야기가 대중에게 알려지길 원했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 레부엘타는 딸 알리나가 10살이 돼서야 생부가 최고 권력자라는 사실을 알렸다.
레부엘타가 카스트로와 육체적 사랑을 나눈 것은 그가 출옥 후 멕시코로 떠나기 전까지의 53일에 불과하다. 그는 알리나의 임신 사실조차 피델에게 알리지 않았다. 레부엘타와 페르난데스는 59년 카스트로의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한 직후 이혼한다. 페르난데스는 딸 니나를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혁명 이후 카스트로는 레부엘타와 거리를 두었고, 알리나도 12살이 된 뒤에야 친자로 인정했다. 카스트로는 이후 네 명의 여인과 8명의 아들을 더 두었지만 재혼하지 않았다.
패션모델과 패션업계 홍보 등 직업을 전전하던 알리나는 93년 15살이던 자신의 딸을 남겨둔 채 위조여권으로 스페인 마드리드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다. 동구권 패망과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쿠바 경제가 급전직하하던 때였고, 서민 경제 역시 참담해진 뒤였다. 알리나는 마이애미 라디오 방송국에 취직, 방송과 기고 강연 등을 통해 쿠바와 카스트로에 대한 독설로 큰 인기와 부를 누렸다. 일주일 여 뒤 미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딸의 망명사실을 알게 된 레부엘타는 훗날 “그녀에게도 그녀의 삶이 있었을 것”이라고만 말했다.
레부엘타는 혁명 정부의 여러 부처에서 다양한 일을 했고, 해외 출장 등을 다니면서도 망명을 꾀한 적이 없었다. 그는 유년의 친구들과 대다수 지인들이 떠나버린 조국에서 외손녀와 둘이 살았다. “그에게서 잊혔다는 것 때문에 내가 내 나라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TV 등을 통해 매일 봐야 하는 그를 잊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또 늘 혼자였지만, 나는 외롭지 않았다.”(유에스뉴스 & 월드 리포트). 80년 은퇴한 뒤 그는 쿠바의 예술가들의 삶을 지원하고, 쿠바의 독립 영웅이자 시인 호세 마르티의 전기를 쓰고, 가능하다면 자신의 이야기도 써볼 생각이라고 월드리포트 기자에게 말했다. 피델에게 비판할 말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호세 마르티의 싯구를 빌려 ‘장미 꽃잎 하나로도(Not even with petal of a rose)’그를 때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가난한 쿠바 농민을 사랑한 그를 무엇보다 더 사랑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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