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다. 패배는 기정사실로 굳어졌고, 실낱 같은 희망의 여지도 없었다. 경험이나 랭킹에서 상대선수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한국테니스의 대들보로 자리잡은 정현(19ㆍ삼성증권 후원)이다.
정현이 남자프로테니스(ATP)투어 대회에서 생애 첫 승을 신고했다. 한국 테니스의 전설 이형택(39)이 2008년 ATP투어 AIG 재팬 오픈 챔피언십 1회전에서 승리한 후 6년 6개월 만에 나온 값진 투어 대회 승리다.
세계랭킹 121위의 정현은 26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ATP 투어 마이애미오픈 단식 본선 1회전에서 마르셀 그라노예르스(50위ㆍ스페인)를 2-1(6-0 4-6 6-4)로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 마이애미 오픈은 4대 그랜드슬램(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 다음으로 등급이 높은 마스터스 1000시리즈 대회다. 매년 9개의 1000시리즈 대회가 열리는데 마이애미 오픈은 상금규모와 출전선수 면면에서 ‘5번째 그랜드슬램’으로 불리는 권위를 자랑한다. 이번 대회에도 노박 조코비치(28ㆍ세르비아ㆍ1위)와 라파엘 나달(29ㆍ스페인ㆍ3위), 앤디 머레이(28ㆍ영국ㆍ4위) 등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마이애미 오픈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세계 랭킹 87위 안에 들어야 하지만 와일드카드를 받은 정현은 예선을 뛰어넘어 곧바로 본선 대진표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대회당 3~5장 정도 나오는 와일드카드를 정현이 받게 된 이유는 최근 그가 보여준 폭발적인 성장세 때문이다. 정현은 한 달새 거의 50단계나 랭킹을 끌어올리며 이번 시즌 돌풍을 예고했다.
본선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정현은 이를 놓치지 않고 2회전 진출 쾌거를 이뤘다. 상대는 ATP투어 대회에서 4번이나 우승한 강자였지만 정현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정현은 첫 세트 첫 서브게임을 따낸 것은 물론, 그라노예르스에게 한 게임도 내주지 않고 6-0 베이글 스코어(0점으로 패했을 때 베이글 빵 모양을 빗댄 표현) 굴욕을 안기며 세트를 선취했다.
자존심을 구긴 그라노예르스의 역공이 이어지면서 정현은 2세트를 내줬지만 3세트 정현의 반격이 불을 뿜었다. 게임스코어 1-2로 끌려가던 정현은 이내 그라노예르스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해 동점을 만들었다. 정현은 게임스코어 4-4를 만든 뒤 강력한 스트로크로 그라노예르스를 제압하고 포효했다.
ATP는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이날 정현의 활약에 대해 “ATP 유망주에 또 다른 10대 소년을 추가해야 할 때”라며 주목했다. 정현은 ATP 홈페이지를 통해 “높은 레벨의 투어 경기를 많이 치러보지 않았다. 날씨와 컨디션, 경기력, 높은 랭킹의 선수를 상대하는 것 등등 모든 것이 힘에 부쳤다”고 경기 후 소감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정현은 “하지만 나는 의욕이 넘쳤다. 내가 이번 경기를 이기면, 더 훌륭한 선수와 겨뤄볼 수 있는 훨씬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올해 목표는 그랜드슬램에서 첫 승을 거두는 것”이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아직은 ATP투어대회보다 한 등급 낮은 챌린지급 대회가 익숙한 정현은 “ATP투어 선수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엄청나다. 게다가 관중도 많고 재미있는 팬들이 많다”며 투어 대회 무대를 밟은 소감을 밝혔다.
이현주기자 memor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