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이어 온 국내 첫 민간극장
신진들의 등용문이자 실험무대
어떻게든 지켜보려 했는데…
10여년간 제작비 건졌던 적 없어
기업 후원 끊긴 뒤엔 월세 못 내
훗날 '창고극장' 이름 살리고 싶어
서울 명동성당 뒤편 언덕길 중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좁은 길 안쪽에 ‘삼일로창고극장’이라는 문패가 눈에 띈다. 1975년 ‘에저또창고극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국내 최초의 민간극장이다. 23일 만난 정대경 대표는 대뜸 극장 문패 옆을 가리키며 “저 간판을 꼭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간판에 적힌 말은 ‘예술은 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위안을 줄 수 있습니다’. 정 대표는 “우리 극장이 추구했던 게 바로 저것”이라고 말했다. 조만간 이 간판을 보지 못한다. 40년이나 명맥을 이어온 이 극장이 내년 문을 닫는다. 70년대 연극의 중심이었던 공간사랑, 민예소극장, 실험극장소극장, 엘칸토소극장, 중앙소극장 등은 이미 폐관됐다.
정씨는 “어떤 직책보다 삼일로창고극장 대표라는 게 자랑스러웠고, 연극계에서 활동한 경력도 있어 주변 몇 사람이 힘을 모으면 극장이 살아날 줄 알았다”며 “한국 연극사에 큰 의미가 있는 극장이기에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했으나 수익 창출이 어려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월세가 1년씩 밀려도 정씨를 격려하며 기다렸던 삼일로창고극장 건물주는 내년 이곳에 새 건물을 개축하기로 했다.
적막한 극장 안 복도에는 이 극장을 전설로 만든 ‘빨간 피터의 고백’ ‘대머리 여가수’ ‘티타임의 정사’ 같은 대표작들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걸려 있었다. 정씨는 “몇 년 전까지 비가 오면 지붕에 물이 새 물받이 깡통을 달고 공연했지만 그래도 배우와 관객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선배들의 기운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들이 곡괭이로 파서 만든 무대였다.
정씨가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처음 본 연극은 1977년 추송웅의 1인극 ‘빨간 피터의 고백’. 연극인으로서도, 개인적으로도 이 극장은 각별한 셈이다. 추송웅이 제작, 기획, 연출, 장치, 연기까지 1인 5역을 맡은 이 작품은 그 해 관객 1만3,000여명을 모으며 모노드라마 붐을 일으켰다. 그는 “삼일로창고극장은 신진들의 등용문이었고, 다양한 작품과 제작 시스템을 실험한 무대였다”고 덧붙였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연중 무휴 공연과 제작 PD시스템을 도입해 많은 연출가를 길러냈다. 강영걸 오태석 등 연출가와 박정자 윤여정 유인촌 등 많은 배우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77년 연극 ‘결혼’에 단역으로 출연한 배우 윤석화는 “민중극단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는 설 수 있는 무대가 별로 없었다. 창고극장은 연극의 언더그라운드 정신을 상징하던 곳”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어려움을 겪은 극장은 여러 차례 폐관 위기를 겪었다. 정대표는 “10여년 간 연극 제작비를 건졌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며 “요즘 시대에 극장 기획 작품을 올리고 수지를 맞추기 위해서는 최소한 250석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165.3㎡(약 50평) 남짓한 공연장의 객석은 106석. 기획 작품을 공연하기 위해서는 매달 극장 유지비 700만~800만원 외에 배우 월급, 희곡 판권료 등 작품 제작비가 1,500만원 이상 든다. 2011년부터 태광그룹 후원 덕에 명맥을 이어갔지만 2013년 10월 지원이 끊긴 뒤 한 달에 330만원인 임차료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는 극장문을 닫기 전 ‘명동시대’를 정리하는 작품들을 올리고 싶다고 했다. 개관 40주년 기념작으로 ‘빨간 피터의 고백’을 비롯해 ‘동물원이야기’ ‘세일즈맨의 죽음’ ‘금관의 예수’ 같은 극장 대표작과 ‘신진 등용문’이라는 옛 명성에 걸맞게 젊은 연출가들의 작품을 올리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다. 정대표는 “마지막 공연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서라도 올릴 생각”이라며 “훗날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라도 창고극장 이름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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