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의혹 일자 사의 표명
경찰 수사 착수로 신분 유지
“광주시정에 대한 부담을 덜어 드리고…(중략)… 저는 오늘 비서실장의 자리를 물러나고자 합니다.”
지난 23일 오후 이재의 광주시 비서실장이 내놓은 ‘사퇴의 변’ 중 일부다. 전 근무처인 전남도 산하 나노바이오연구원(장성 소재)에서 터진 기자재 납품 비리 의혹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자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윤장현 시장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다”며 이 실장의 사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실장의 사퇴는 그의 의지와 달리 겨우 몇 시간 만에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실장의 갑작스러운 사의 표명 소식을 접한 경찰이 곧바로 광주시에 이 실장에 대한 수사 개시 통보를 했기 때문이다. 이 실장을 수사대상에 올려 놓고 있던 광주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이 실장을 업무상 횡령 혐의를 받는 피의자로 정식 입건해 수사에 착수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경찰은 이 실장이 2006년 11월부터 비서실장 임명되기 전인 올해 1월 말까지 나노바이오연구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기자재 납품업자에게 예산을 편법으로 집행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 광주광역시 비위 공직자의 의원면직 처리 제한에 관한 규칙엔 의원면직(본인 의사에 따른 퇴직)을 신청한 공무원이 감사원과 검찰, 경찰 및 그 밖의 수사기관에 수사를 받고 있는 경우 임용권자인 광주시장은 해당 공무원을 의원면직 처리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이에 따라 윤 시장은 이 실장의 사표를 수리하지 못하게 됐고, 이 실장은 사의 표명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신분을 유지한 채 경찰의 수사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됐다. “광주시정의 부담을 덜어주고 공인의 신분이 아닌 자연인의 신분에서 보다 충실하게 (경찰 수사에 대한) 방어권을 행사하겠다”는 이 실장의 계획은 무산된 셈이다. 최근 경찰 수사에 대비해 변호사를 선임한 이 실장은 24일 연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이처럼 이 실장의 사퇴가 불발에 그쳤지만 그를 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던 윤 시장의 정치적 부담은 한층 커지게 됐다. 더구나 민선 6기 첫 비서실장이 임명 6개월 만에 교체된 데 이어 이 실장마저 임명 2개월 만에 과거 비위 의혹으로 사의를 표명하는 상황까지 벌어지자 인사 검증 ‘구멍’에 대한 비판과 함께 윤 시장의 용인술(用人術)도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일각에선 ‘단명(短命)’ 비서실장 등 정무라인에 대한 잇따른 인사 실패가 그 동안 광주시 산하 기관장 임명 과정에서 정실, 보은, 절친 인사 등 숱한 논란을 뿌렸던 윤 시장의 고립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지금과 같이 구멍 뚫린 인사검증 시스템은 결국 윤 시장의 판단 실수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겉돌고 있는 광주시정을 흔들게 될 것”이라며 “인사 파행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있는 윤 시장은 자신의 오판에 대해 시민들에게 사과하고 인사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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