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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복지는 빈곤 아닌 불안을 해결해야

입력
2015.03.2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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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가난한 사람에게만 주느냐,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느냐’의 복지 논쟁에 대한 입장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피아를 구분하는 핵심 잣대가 됐다. 그런데 솔직히 헷갈릴 때가 많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먹는 밥이나 영유아의 보육비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부유층 자녀에게까지 국민 세금을 들여 급식과 보육을 지원할 필요가 있냐’는 주장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무상급식 예산 지원을 중단한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어 저소득층을 더 돕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고 한 것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역설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 그들의 빈곤을 해결하는 복지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선량한 구호 뒤에는 편가르기가 숨어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구분된다.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일정한 기준을 정해 지원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해진 저소득층에게 도움을 줘 그들의 빈곤 문제가 해결되면 진정한 복지가 실현된다는 논리다.

그런데 학교 급식을 공짜로 먹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유를 가진 사람, 적어도 받는 쪽보다는 형편이 좋아 주는 쪽에 속하는 사람은 별 문제가 없을까.

어떤 사회복지학자는 박근혜 정부의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에 빗대 한국 사회를 ‘생애주기별 맞춤형 불안’에 시달리는 사회로 표현했다. 학생 때는 입시불안, 졸업을 하면 취업불안, 결혼을 하면 주택과 육아 문제에 대한 불안, 자녀가 성장하면 사교육비 불안, 노년이 되면 자녀의 취업ㆍ결혼 문제와 노후에 대한 불안을 순차적으로 겪게 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불안은 저소득층, 중산층, 고소득층 구분 없이 모든 국민들에게 해당되는 문제다.

이런 불안은 극단적인 가족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올해 1월에는 실직한 가장이 가계 파탄에 대한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와 두 딸을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가장은 명문대 출신에 고액연봉을 받았으며, 직장을 그만 둔 뒤 빚을 지긴 했지만 서울 강남에 11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 절대 빈곤 상태로 추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가족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가족을 죽였다고 했다.

비슷한 가족 살인이 장애인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특히 많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사회안전망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교육(특히 장애인)과 취업, 주택 문제 등에 대한 모든 부담을 개인이 떠안아야 하는 구조에서 가장의 실직, 질병, 사고는 불안을 넘어선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이러한 ‘전국민의, 전생애에 걸친’ 불안들이 해결되려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수준의 복지로는 턱도 없다. 특히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을 구분해서는 더욱 불가능하다. 받는 사람은 저소득층의 낙인 때문에 지원 받기를 꺼리고, 주는 사람도 자신이 낸 세금이 올바로 쓰이고 있는 지 항상 의문을 갖는 상황에선 복지의 규모가 축소될 수 밖에 없다.

지난달 한국일보와 한국재정학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53.4%는 “복지 확대를 위해 추가적으로 세금을 낼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그래서 학교 무상급식을 놓고 어떤 학생들에게 공짜밥을 먹이느냐로 싸울게 아니라 복지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가난한 학생을 먹이기 위해 부유한 사람의 세금을 뜯어내자는 ‘선동’ 대신 내가 낸 세금이 내 아이의 밥으로 돌아온다는 ‘세금의 선순환’을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가능하면 세금은 안내는 게 좋다는 인식이 만연하고, 세금을 올리면 거센 불만이 터져 나오는 상황에선 어떤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국민의 불안을 해결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 결국 국민들이 ‘기꺼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준규 사회부 차장대우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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