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 기사로 25년간 일하며
10년 넘게 아내와 맞벌이로 저축
임금 동결에 계속된 원격지 발령
2009년 사실상 구조조정 당해
대출받아 철거업체 차렸지만
대형업체 횡포 등에 역부족
안정된 노후의 꿈 물거품으로
구조조정에 따른 명예퇴직, 창업실패, 마지막 보루였던 내 집 포기….
일용직으로 일하는 이기환(53)씨는 최근 5년 간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생각하면 속이 탄다. 세 자녀는 쉬지 않고 자라는 데 자신의 인생만 급정거해 오히려 가족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 퇴직 후 더욱 열심히 일했지만 빚만 쌓였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것일까.
이씨는 2009년 퇴직할 때 까지 25년간 KT에서 케이블 유지ㆍ보수기사로 일했다. 화려한 대졸 사무직은 아니나 안정된 직장에서 중산층의 삶을 누렸다. 지역의 은행에서 일한 아내와 10년 넘게 맞벌이를 했다. 2000년대 초반 이씨와 아내의 월 급여는 각각 210만원과 300만원 수준이었다. 상여금이 나오는 달에는 부부 손에 500만~600만원이 꼬박꼬박 쥐어졌다. 2003년 가구당 월평균 소득이 약 282만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돈이다. 여윳돈으로 차곡차곡 통장 잔고를 불렸고, 2001년 충남 논산에 100㎡(30평) 아파트(약 6,800만원)를 마련했을 때는 “이제 됐다” 싶었다.
“큰 아이 데리고 부산, 거문도 등으로 매달 여행도 다니고 부모님께는 논산 시내 연립주택(2,500여만원)도 마련해드렸죠. 동생이 투자 손해를 봤을 때는 힘내라고 돈도 보태줄 수 있었어요. 어찌 보면 살맛이 낫다고 할까…. 이렇게만 열심히 살자고 생각했죠.”
그러던 이씨는 2009년 퇴직했다. 그는 “1999년 이후 월급이 거의 오르지 않았고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는 출퇴근에만 1시간 넘게 걸리는 원격지 발령이 계속돼 여러모로 버티기 힘들었다”고 했다. 충남 논산에서 충북 진천까지 왕복 270㎞를 출퇴근하려니 교통비ㆍ기름값으로만 매달 50여 만원이 나갔다.
이렇게 버티느니 퇴직금으로 새 출발하는 것도 좋은 계획 같았다. 이씨는 퇴직금 1억8,000여 만원을 받아 나왔다. 지인의 고물상 사업에 투자하고 1년 넘게 함께 일하며 철거 및 폐기물 수집사업을 배웠다.
산소절단기 작업을 하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도 1달도 안돼 현장에 복귀할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투자금은 금세 바닥났고, 은행잔고도 줄어갔다. 2003년 셋째 출산 후 은행을 그만두고 분식집을 차린 아내도 고군분투했지만 다섯 식구 생활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씨는 2011년 1억3,000만원을 대출받아 자신의 철거업체를 차렸지만 월 수입은 수십 만원에 그쳤다. 이씨는 “비슷한 시기에 나처럼 창업한 경쟁업체들이 너무 많았고 고철 값도 계속 떨어져 마진이 무척 적었다”며 “물건을 사재기해가는 대형업체들을 당할 재간도 없었다”고 했다.
당장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철거일 대신 지인의 떡집에서 주문 떡을 만들어 배달했지만 생활비에 은행 이자까지 내긴 쉽지 않았다. 악순환이 계속되자 이씨는 올해 초 결국 아파트를 내놓기로 결심했다. 매달 은행대출이자 80만원, 보험료, 아파트 관리비, 학비, 생활비 등을 감당하기 어려워 우선 집을 팔아 대출금부터 갚기로 했다. 올해 1월부터는 건축업체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
안정된 노후와 인생 2막을 꿈꾸다가 ‘빈곤’문제를 고민하게 된 것은 이씨만의 사정은 아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달 발표한 ‘중산층의 삶의 질 변화’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가구 대비 중산층 비중은 1990년 75%에서 2013년 67.1%로 감소한 반면 저소득층은 7.6%에서 14.3%로 2배 가까이 늘었다.
김광수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직장 퇴직 후 노동시장에 재진입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비자발적인 창업을 하게 되는 현실이 중산층 감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이들의 노동시장 재진입을 위한 양질의 재취업 일자리 확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과밀하게 집중돼 있는 업종으로 창업하거나 과도한 부채를 안고 창업을 시작하지 않도록 정책적으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글ㆍ사진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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