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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우리 모두의 감정과 상관없이

입력
2015.03.1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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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딸이 그토록 키우고 싶어 하는 원숭이 한 마리를 사기로 했다. 아빠의 직업은 항해사였다. 하면 안 되는 거였지만 그래도 해보는 거였다. 가끔 우리는 사랑 앞에 눈이 멀기도 하는 거니까.

태국으로 출장을 가서 원숭이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곳을 물었다. 딸아이가 좋아할, 그리고 딸아이와 함께 잘 성장해줄 어린 원숭이를 고르고 골랐다. 한 마리의 어린 원숭이와 눈이 마주쳤다. 목포항에 배가 도착을 하면 세관원들의 눈을 교묘하게 피하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긴 항해가 이어졌다. 항해하는 동안, 어린 원숭이의 상태가 문제였다. 자신이 동물시장에 갇혀 있다가 팔려왔으니 그 불안으로 마음이 좋지 않았을 거였다. 쉽게 반항하고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대책을 간구하던 항해사는 먹이로 다스리리라 마음을 먹고는 굶기다가 소량의 먹이를 주고 또 굶기다 먹이를 주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원숭이는 주인에게 마음을 열기로 했다. 같이 잠도 자고 같이 목욕도 하곤 했던 배 안에서의 처음 며칠은 그래도 좋은 날들이었다.

며칠 후, 베트남의 다낭을 지날 때쯤의 일이었다. 원숭이가 땅 냄새를 맡고는 배에서의 탈출을 시도했다. 저 멀리 보이는 땅으로 도망을 간다면 그래도 지금처럼 배를 타고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향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마음을 먹은 거였다. 원숭이는 힘차게 바다로 뛰어내렸다.

원숭이가 탈출하는 모습을 목격한 갑판원이 주인인 항해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놀란 항해사가 갑판에 매달려 바다를 내려다보는데 원숭이가 사력을 다해 헤엄을 치기는 했지만 파도의 힘에 떠밀려 멀리 나가지 못한 채 힘에 부쳐하고 있었다.

비상시에 쓰는 장대를 급히 들고 와 바다에 내렸다. 원숭이는 하는 수 없이 장대를 타고 배 위로 올라와야만 했다. 항해사와 바닷물에 젖은 원숭이가 숨을 고르며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항해사는 아무 말 없이 먼 데만 바라보았고 원숭이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항해사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속에서 미어터지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원숭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뭐라고 미안한 마음을 변명해야겠으나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거였다.

다시 가야 할 길은 멀고 가야 할 날들은 많이 남아 있었다. 둘은 서서히 화해했다. 좁은 배 안에서 그것은 차라리 쉬웠다.

마침내 목포항에 도착했다. 여느 때처럼 세관직원들은 배 안을 수색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안보위해품과 마약은 물론 동식물의 반입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다. 항해사는 원숭이를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욕실에 들어가 있으라 하고 문을 잠갔다. 그곳은 세관직원들도 늘 의심없이 지나쳐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원숭이는 상황을 알지 못하고 욕조에 들어가 물을 틀어 놓고 물놀이를 하다가 제 기분에 취해서 이런저런 소리를 냈던 것이다.

세관직원이 그곳을 열라고 했다. 물놀이를 하고 있던 어린 원숭이 한 마리와 세관직원의 눈이 마주쳤다. 목포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격리수용할 공간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두가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딱하게도 항해사에겐 안 된 일이었지만, 일단 세관직원이 원숭이를 자신의 집에 데려다 놓기로 했다. 전염병을 퍼뜨릴 가능성이 있으니 먼저 우리 안에 가두었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기까지의 한 달 여 시간 동안 세관직원과 가족 모두는 원숭이에 빠져 지냈다. 리모콘을 가져달라고 하면 리모콘을 가져오고 꽃에 물을 주라고 하면 꽃에 물을 주는 ‘사람스러운 존재’에게 빠져들었고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름다운 시간들이 어떤 안 좋은 소식에 떠밀려 단절될 거라고는 일말의 의심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감정과 상관없이 세관으로부터 전달받은 원숭이 처분 서류의 빈칸에는 ‘화형(火刑)’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병률 시인ㆍ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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