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2003년 이라크 전쟁 발발 이전 대량파괴무기(WMD) 보유 여부를 두고 의도적으로 애매한 자세를 견지했다. WMD 미보유가 확실해지면 이라크 국민과 숙적 이란을 비롯한 주변국의 두려움이 사라져 대내외적 영향력을 잃을 게 싫었다. WMD를 갖고 있다는 오해에 따른 미국과 그 동맹국의 무력공격 가능성은 부담스러웠지만, 미국이 최종 확인도 거치지 않고 무력공격에 나설 줄은 몰랐다.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 또는 ‘계획적 모호성(Deliberate Ambiguity)’ 정책의 대표적 실패 사례다.
▦ 한 국가가 외교 정책이나 전략무기의 보유 여부 등을 애써 흐리는 ‘전략적 모호성’ 정책에는 나름대로의 이점이 있다. 대내외 정책목표가 상충할 때나 편중된 안보전략에 따르는 만일의 위험을 피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동맹국에 핵무기를 배치했는지를 두고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미국의 전통적 NCND(Neither Confirm nor Denial) 정책이 좋은 예다. 다만 이라크의 예에서 보듯, 그런 모호성이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치명적 약점은 있다.
▦ 말에 담는 순간 축복이 재앙으로 바뀌는 ‘언령(言靈) 신앙’의 설화처럼, 공식 언급되는 순간 약발이 사라지는 것도 그 속성이다. 지난달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국회 국방위에서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ㆍ사드)의 주한미군 배치문제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필요”를 밝혔다. 청와대가 “우리 정부의 입장은 3 NO(요청도 협의도 결정된 것도 없다)”라며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부의 모습만 부각됐다.
▦ 따지고 보면 한시적 ‘전략적 모호성’은 결국 ‘눈치보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미국의 NCND는 물론이고, 핵미사일잠수함의 보복공격용 핵무기 탑재 여부를 밝히지 않는 영국의 정책에 비해 사드 문제는 단기적이다. 그래서 이미 약발을 다한 ‘전략적 모호성’을 최대한 유지하자는 주장이 다소 공허하게 들린다. 이렇게 된 마당이면 차라리 안보와 국익을 잣대로 사드 문제를 공론화, 국민적 지혜를 모아가는 게 나을 듯도 하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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