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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 대신 책을 잡다

입력
2015.03.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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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노숙인 도서관 소담재, 서울 '은평의 마을'에 문 열어

인문학 서적 1000권 갖추고 운영도 노숙인들에 맡기기로

서울 구산동 노숙인 요양시설 '은평의 마을' 거주자들이 14일 문을 연 노숙인 인문 도서관 '소담재 '를 찾아 빌릴 책을 고르고 있다. 은평의 마을 제공
서울 구산동 노숙인 요양시설 '은평의 마을' 거주자들이 14일 문을 연 노숙인 인문 도서관 '소담재 '를 찾아 빌릴 책을 고르고 있다. 은평의 마을 제공

“하루키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14일 오전 서울 구산동의 노숙인요양시설 ‘은평의 마을’. 이곳에 거주 중인 노숙자 김모(47)씨가 시설 내 도서관 ‘소담재’에 들어섰다. 시선을 한 참 책에 고정하던 그가 떨리는 손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집어 들었다. 소설은 방황과 고뇌로 성장하는 주인공을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작품. 김씨는 “노숙을 하다 보니 먹고 살 걱정만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린 뒤 “책을 보니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고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은 흔히 노숙인을 술을 마시고 난동이나 부리는 존재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지적 욕구는 있다. 사유(思惟)하는 노숙인. 그들을 위한 인문학 도서관 소담재가 국내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이날 개관한 소담재는 은평의 마을이 지난해 9월부터 토요일마다 노숙인 50여명을 상대로 진행 중인 ‘사랑과 치유의 인문대학’ 사업의 연장이다. 한국영성철학연구회 소속 교수, 연구원 등 인문학자 10명이 재능기부를 통해 노숙인의 자활을 돕고 있다. 나른한 오후 2시 시작되는 수업에도 단 한 명의 지각생이 없을 만큼 인기가 많다. 소담재는 “대학은 있는데 대학의 핵심인 도서관은 왜 없느냐”는 아쉬움에서 출발했다. 은평의 마을에는 무협지나 만화책을 구비한 휴게실만 있었을 뿐, 인문학 강의를 들은 수강생들이 책을 읽고 사색할 공간은 없었다.

소담재는 출판계의 십시일반으로 세워졌다. 도서관 건물은 기존 휴게실을 리모델링 했고, 도서관 뼈대인 서가와 열람실 책상, 의자는 후원금 4,000여만원으로 충당했다. 도서관을 가득 채울 장서는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 1,000여권을 기증했다. 또 이용훈 서울도서관장은 노숙인들이 직접 도서관을 운영할 수 있도록 사서 교육 등을 약속했고, 안찬수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은 책을 활용한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로 했다.

노숙인들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도서관 사서로 임명된 지영환(73)씨는 “어려운 인문학 서적도 계속 읽다 보면 깨달음을 얻는 날이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은평의 마을 원장인 이향배 수녀는 “도서관은 외부와 단절된 삶이 세상과 이어지는 통로”라며 “노숙인들이 인문학을 통해 잃어버렸던 자신의 참 모습을 되찾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할 듯하다. 이미 도서 1만권이 추가 기증 예정이고, 인문대학에 입학하고 싶다는 요청도 쇄도하고 있다. 도서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문학을 통해 새 삶을 얻은 노숙인들이 거리로 나가 변화를 설파하는 것. 그리 되면 언젠가는 거리에서 음주 대신 독서를 하는 노숙인들이 생겨나지 않겠느냐는 바람이다.

김경집 노숙인 인문대학장은 “실패해서 바닥에 떨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희망을 주는 것이 복지인데, 소담재가 그 역할을 해내리라 믿는다”며 “제2의 노숙인 도서관 설립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장재진기자 blan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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