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죄·배상 요구가 해결 전부 아냐… 망언은 범죄 규정해 처벌 요구해야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 군인에 의해 끌려가는 ‘강제연행’을 강조하는 것은 일본 우익의 프레임에 오히려 말려드는 것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식민지가 점령지와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국의 영토로 편입돼, 차별하고 착취하기 위해 만든 식민지 체제 속에서 취업사기 인신매매는 그 자체가 바로 식민지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와 위안소제도 전문가인 윤명숙(54) 충남대 국가전략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최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군인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점령지의 특징”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윤 연구원은 2003년 일본 히토쓰바시(一橋)대 연구교수로 있을 때 ‘조선인 군 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라는 책을 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직후부터 피해자 증언을 모으고 문헌 자료를 찾기 시작해 무려 9년 동안 이 문제를 총체적으로 집대성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하다.
이 책이 뒤늦게 한국어로 번역돼 600쪽 넘는 두툼한 책으로 최근 이학사에서 출간됐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란이 현재진행형이다. 윤 박사에게서 조선인 위안부의 실상은 무엇이었는지, 위안소제도는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들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위안부는 어떻게 가게 됐나.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에 42명의 43가지 사례가 나온다. 이중 6명 정도가 군인이나 순사, 헌병에 의해 위안소에 갔다고 말하고 있다. 유형을 분류해도 이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얽혀있지만 ▦군인 등의 체포ㆍ납치 ▦마을 구장(區長)ㆍ반장의 강요 ▦취업사기 및 인신매매에 의한 것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사례의 80% 정도가 취업사기 및 인신매매에 해당한다.
100% 단언하지 못하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군인에게 끌려갔다고 얘기하는 “국방색 옷을 입은 남자”라는 것은 ‘국민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식민지’징모에서 군인이 여자들 앞에 직접 나설 일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근대사 전공자라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군인이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점령지’의 특징이다.”
-군에 의한 연행이 적었다는 것인가.
“식민지와 점령지는 다르다. 식민지(조선)에서는 군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도 지배 시스템 속에서 동원이 가능했다. 일본 내에서 국가책임을 인정하는 학자나 운동가들이 얘기하는 ‘강제연행’ 자료는 다 점령지에서 연합국 여성 등을 끌고 간 경우다. 일본 아베 정부나 우익들이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주장하는‘강제연행’은 총검을 앞세운 군인의 징모나 법에 따른 연행이 없다고 하는 것인데, 그들이 강제연행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관련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설사 취업사기라고 해도 강제성이 있는 것이고 일본의 책임 아닌가.
“위안소제도라는 것은 군과 일본 제국주의 국가가 당연히 책임의 주체다. 전시체제는 국가와 군의 통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체제다. 물자뿐만 아니라 인적 동원도 다 통제된다. 더군다나 위안소는 군의 시설인데 군의 시설에 필요한 여성을 이송하면 당연히 군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위안부 징모 지역에서 경찰과 헌병과 긴밀한 연대를 가지고 업자더러 ‘모집’하라고 한 자료도 있다.
다만 식민지에서는 징모 현장에 군인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이 특징이어서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 군인에 의해 끌려가는 ‘강제연행’을 강조하는 것은 (‘강제연행’이 없었다는)일본 정부나 우익들의 프레임에 오히려 말려드는 것이 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식민지가 점령지와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국의 영토로 편입돼, 차별하고 착취하기 위해 만든 식민지 체제 속에서 취업사기 인신매매는 그 자체가 바로 식민지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취업사기나 인신매매 역시 그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다. 매매춘을 위해 아동이나 부인을 속여서 데려가거나 하는 동원 방식은 국제조약 위반이자 형법의 영리유괴에 위반되는 것이다. 게다가 미성년자에게는 매춘이라고 알리고 본인이 승낙했다 하더라도 국제법 위반이다. 일본 내 형법에서도 사람을 영리로 유괴 하는 것, 거짓말과 폭력으로 제압하는 식의 유괴로 이익을 취하면 안 된다. 당시 자료를 보면 일본은 이 행위가 국제법 저촉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련 문서를 대다수 파기한 것일 거고, 총독부 자료 자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이 강제연행 자료 있으면 한국이 내놔보라고 한 적이 있다. 한국 소장자료는 어떤가.
“자료와 관련해서는 조선총독부가 1945년 패전 직후 한국에 남긴 자료를 국가기록원에서 검토한 적이 있다. 검토 결과, 특히 군위안부의 징모나 이송에 관련이 깊은 부처인 외사나 경무의 경우는 자료 자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특히 1943년 이후는 어느 것도 ‘0’였다. 또한 패전 직전에 물자가 부족하니 주요 문서만 남기고 재활용하라는 지방행정 자료를 확인했다. 이처럼 자료에 관해서는 거꾸로 자료를 남겨놓지 않은 일본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는 20만명 규모인가.
“규모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다만 학자마다 추정치가 다른데 가장 최소치가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의 2만이고,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4만5,000~20만, 중국학자 소지량 교수는 36만~41만이라고 한다. 일본인 위안부는 병참 등에서 주로 장교를 상대했다고 하고 조선인이 위험한 곳이나 전선에 보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위안소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일본에 의해 가해진 명백한 국가범죄이자 폭력이라는 점이다. 민족차별이자,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며,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후 재판 과정에서 이 문제를 바라봤던 제국주의의 시각에서는 인종차별도 나타난다. 미국이 주도한 도쿄재판에서 위안부 문제가 거론됐을 때 일본측에서 ‘중국에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위안소를 설치했다’고 해명했고 아무도 처벌 받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여성이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위안부를 강요당한 사례는 일본군이나 업자들이 처벌 받았다. 베트남에서 일본군이 프랑스 자매를 끌고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 총살해 처벌된 사례도 있다. 똑같은 범죄인데 다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그 이후 아무런 조처가 없었다는 것은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인종주의가 드러났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유형은 위안소제도 아래에 놓여 있던 위안부 피해자라는 범주에 국한되지 않는다. 위안소 제도는 일본군이 전쟁 중 저지른 성폭력 중 한 가지 유형이다. 난징대학살 때처럼 강간한 경우도 무수하다.
이와는 별도로 한 가지 생각해 볼 일은 식민지 여성의 경우 위안부 피해자였다가 일부 장교의 눈에 들어서 현지처처럼 일대일로 상대한 경우가 드물지만 있다. 그 경우 본인은 불특정 다수 상대하다 일대일이니 피해라고 생각 못할 수 있다. 뭔가 나아진 것처럼 생각하지만 너무 참혹했던 이전 생활에서 변화가 있었던 것일 뿐 이것 역시 피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인식 차이는 왜 생겼나.
“미국은 전쟁이 끝난 뒤 일본 국가원수이자 군 통수권자인 천황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 직전, 즉 소련이 전쟁에 참여한 시점부터 이미 냉전이 시작돼 천황을 그대로 두는 것이 통치하기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매년 8ㆍ15 직전에 전쟁을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는 캠페인을 많이 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일본인들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이 있는 거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 피해 이야기로 이렇게 참혹한 전쟁은 다시는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식이다. 전쟁체험코너에서는 수제비를 먹으며, 이런 비참한 전쟁을 다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식민지나 점령지에서 저지른 가해라는 부분은 거의 머리 속에 없다. 패전에 대한 기억은 강렬하지만 스스로 전쟁 책임을 따져 묻거나 자각하지 않은 상태로 지나왔고 그런 부분을 제대로 교육하지도 않았다.”
-위안부 문제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사죄와 배상이 해결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을 위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한일협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식민지 지배책임을 따져 물었어야 하는 것을 덮고 왔다. 위안부 문제는 그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고.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어느 제국주의도 책임지지 않았던 굉장히 중요한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슈를 배상문제로만 수렴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연구자로서 보기에는 이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일본 정부에게 제대로 된 위안부에 대한, 식민지에 대한 교육을 최소한 20년 동안 끊임없이 하라고 요구하면 어떨까. 이와 함께 정치인이든, 일반인이든 이른바 망언이 나올 경우에 이를 범죄로 규정해 처벌하라고 요구하고. 일본이 진정으로 사죄할 마음이 있다면 이 두 가지를 지속해서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반대로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이 자꾸 사라져가고 있다.
한일 양국에서 교육을 통해 그것이 왜 인권침해이고, 범죄인지 제대로 가르치면 한일관계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을 해야 사죄도 진정성 있게 들리는 거고 그래야 치유도 되는 거다. 그런 것 없이 이름만 배상이라고 붙었다고 한들 배상이 되는 게 아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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