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진 개 부검하니 독살
피해견 모두 유력한 우승 후보
최고 명견 가리는 세계적 대회
경쟁 치열해 각종 음모론 난무
‘독살의 여왕’ ‘살인의 천재’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여류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속에서 등장할만한 사건이 실제로 영국에서 벌어졌다. 독살 대상은 사람이 아닌 반려견이지만, 특정 대회에 참가한 반려견 5마리가 잇따라 죽거나 심각한 독극물 중독 증상을 보이면서, 각종 음모론이 난무해 영국뿐 아니라 전세계 호사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유력 우승견의 갑작스런 죽음
사건의 무대는 세계 최대 반려견 품평회인 ‘영국 크러프츠(Crufts) 도그쇼 2015’의 막전막후다. 지난 5일부터 8일까지 영국 버밍엄 국립전시센터에서 열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벨기에에서 날아온 3살짜리 아이리시세터견 ‘재거’가 대회 참가 직후인 6일 갑자기 죽은 것이다. 부검 결과 재거의 위에서는 독이 묻은 훈제 소고기 조각들이 발견됐는데 무려 3가지 서로 다른 독이 들어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어 매년 수만 마리의 개가 참가하는 이 대회에서 재거는 아이리시세터 부문 준우승을 차지했다. 과거에도 각종 도그쇼에서 수상 전력이 있는 재거는 혈통이 보장된 이른바 ‘순종견’으로 몸값이 5만파운드(약8,400만원)에 달할 것으로 평가된다.
재거의 주인인 알렉산드라 로워는 “재거는 인간을 잘 따랐지만 인간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며 분노했다. 재거의 공동 견주 제러미 보트도 “누구의 소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부 범죄인 것 같다”며 “대회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의 짓인 것 같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우리 개도 당했다”
재거의 석연치 않은 죽음이 알려지자 다른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우리 개도 당했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양치기개 부문에 참가한 마일리 토머스씨도 “재거가 죽은 직후인 7일 우리 개도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며 “가벼운 중독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미뤄 독을 먹은 것 같다”고 주장했다. 대회 중간 화장실에 가려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개에 대해 잘 아는 누군가가 개에게 독성 물질을 먹였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대회에 참가한 웨스트 하일랜드 화이트테리어, 아프간 하운드, 시추 등 또 다른 참가견들도 대회 직후 안 좋은 상태를 보이고 있다고 견주들은 주장했다.
피해의 대상이 된 개들은 모두 품종이 우수한 개들로 수상이 유력시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대회 참가견이 증가하고 수상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부 참가자들이 경쟁견들에게 페인트를 뿌리거나 특정 약품을 주사하는 등 부정행위가 빈번해 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특정 성분의 개껌을 반입해 개들의 이상 반응을 유도하는 사례도 잇따라 적발됐다. 버밍엄 지역의 한 수의사는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며 “다만 실제로 개가 죽은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초 재거는 범행 대상이 아니었다?
원래 범행 대상은 재거가 아닌, 도그쇼 1위를 차지한 4살짜리 ‘누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당시 참가견들은 대회장에 입장하기 전 대기용 밴치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위권 입상이 유력시 되는 재거와 누들이 서로 지정석(?)을 바꿔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아이리시세터 종인 두 개의 생김새는 거의 똑같기 때문에 범인이 범행 대상을 헷갈렸다는 주장이다. 재거의 또 다른 공동견주인 디 밀리건 보트는 “견주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가 ‘누들’을 목표로 범행을 저질렀는데 얄궂게도 누들 자리에 앉아 있던 재거가 희생양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벨기에 경찰과 영국 경찰은 물론, 영국 왕립동물학대방지재단까지 본격 수사에 나섰다. 일단 독이 묻은 스테이크에 대해 성분 분석을 의뢰하는 한편 견주들의 주장도 면밀히 살피고 있다. 또 다른 개들에 대한 독살 시도 의혹에 대해서도 조사를 진행 중이다.
크러프트 도그쇼는?
이 대회는 1891년 강아지 비스킷 회사 직원이었던 찰스 크러프트가 1891년 빅토리아 여왕의 후원을 받아 처음 개최했다.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웨스트 민스터 클럽 도그 쇼’와 함게 세계 도그 쇼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며 수상 견에게는 ‘최고’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크러프트가 사망한 후에는 1948년부터 영국 케널 클럽이 주최하고 있다. 2003년에는 우리나라 진돗개 ‘장군’이 참가해 호평을 받았고 2005년에는 진돗개 두 마리가 나란히 2위에 오르며 명견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강주형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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