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만 해도 동결 정당성 설파, 흔들리는 독립성 단적으로 드러내
“소비가 부진한 이유는 소득증가세가 약하고 가계부채가 높은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수년째 가계부채 증가율이 소득증가율을 웃돌고 최근에는 증가 속도가 다시 빨라지고 있다.”(1월 금융통화위원회 기자회견)
“이달 금리를 내렸다고 가계부채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계부채는 금리인하에서 비롯한 문제라기보단 우리 경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12일 금통위 기자회견)
가계부채의 심각성에 대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극적인 태도 변화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한은의 독립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불과 두 달 전 가계부채를 내수 부진의 주요인으로 꼽으며 금리동결 결정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통화당국 수장은 12일 금통위 기자회견에서 “가계부채는 관계당국끼리 머리를 맞대고 풀어나갈 문제”라고 한발 빼면서 사상 첫 1%대 기준금리 인하를 내수 진작책으로 내놓는 모순된 행보를 보였다. 비난 여론을 의식한 듯 한은은 이날 오후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관계 당국과 ‘가계부채 관리협의체’를 구성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명분뿐 아니라 절차 면에서도 이번 금리 인하는 실망스럽다는 평가다. 이 총재 취임 이후 시장과의 소통을 그토록 강조했던 한은이 시장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전임 총재 재임기를 거론하며 “한은 기준금리 결정이 기대와 어긋났다고 시장에서 평가하는 걸 보면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고 했던 이 총재는 취임 후에도 “금리를 조정하게 되면 2, 3개월 전에 시그널을 주겠다”고 밝히는 등 예측 가능한 금리정책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한은은 지난달 넉 달 연속 금리동결을 결정한 이후에도 금리인하를 점칠 만한 신호를 거의 보내지 않았다. 금리 동결은 금통위원 7인 만장일치로 결정됐고, 총재도 기자회견에서 연초 지표 악화를 지적하는 질문에 “우리의 올해 성장률 전망을 수정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지난달 금통위원 다수가 원화 환율 절상에 따른 수출 부진 등을 자못 심각하게 논의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긴 했지만 해당 의사록은 이번 금통위 회의 이틀 전에야 공개됐다. ‘깜빡이’(사전 신호)도 안 켜고 급작스레 ‘유턴’(금리 인하)을 단행한 한은의 이번 결정을 두고 “불과 한두 달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한은의 부실한 경기전망 능력이 자초한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한은이 통화당국으로서 여타 경제정책 당국과 유지해야 할 건전한 긴장관계를 잃어버렸다는 비판이 많다. “정부와 정치권의 금리인하 압박에 굴복한 이 총재에 대해 매우 실망스럽다”(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는 날선 논평이 나오는 이유다.
이훈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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