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 진흥과 중국 통일 꿈꾸며
1911년 신해혁명 후 공화정 수립
지난해 지방선거 국민당 참패
내년 총통선거도 야당 승리 유력
"양안 최대 위협은 분열세력"
시진핑 독립세력에 강력 경고
쑨원(孫文ㆍ1866~1925ㆍ호 중산) 사망 90주기인 12일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 중산릉(中山陵)엔 아침부터 참배객의 행렬이 이어졌다. ‘박애’(博愛)라고 쓰여진 패방(牌坊) 밑을 지나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을 걸어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고 새겨진 능문(陵門)을 통과하자 짙은 청기와를 올린 석조 건물 아래 큰 비석이 서 있었다. ‘중국국민당, 총리 쑨 선생을 이곳에 장례 지내다’라고 쓴 비문은 황금색이었다. 1911년 신해(辛亥)혁명에 성공한 쑨원은 1912년1월1일 삼민주의(三民主義ㆍ민족 민생 민권)를 지도 이념으로 하는 공화정 중화민국을 세우고 임시 대총통에 올랐으나 얼마 뒤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자리를 내주고 총리로 밀렸다.
비석 뒤엔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오르막 계단 392개가 펼쳐져 있었다. 중산릉 조성 당시 중국의 인구인 3억9,200만명을 상징한다. 계단 위 제당(祭堂) 건물 안엔 백옥으로 만든 쑨원의 좌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의 시신은 그 뒤 묘실(墓室)안에 안장돼 있다. 입구부터 이곳까지 쉬지 않고 걸었는데 20여분이 소요됐다. 그는 2,100여년간 이어져 온 중국의 봉건 전제 통치를 종식시켰지만 그의 묘는 여느 황제의 능보다 더 컸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장제스(蔣介石) 전 국민당 주석은 쑨원의 묘를 웅대하게 조성, 후계자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중국 대만 모두 쑨원 90주기 추모열기
이날 오전9시 쑨원의 좌상 앞에서는 장쑤성과 난징시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9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전국에서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찾아 온 참배객의 줄도 하루 종일 이어졌다. 중산릉 관계자는 “평상시 매일 2만여명 정도 찾아 오는데 오늘은 3만명도 넘는 사람들이 온 것으로 추산된다”며 “쑨중산 선생은 부패한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선구자”라고 밝혔다. 난징이 고향인 리창위안(李長遠ㆍ65)씨도 “쑨중산 선생은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장제스보다도 더 앞선 시대에 일본과의 전쟁을 이끄신 분”이라며 “59세에 너무 빨리 돌아가신 게 아쉽다”고 말했다.
이날 쑨원 90주기 기념식은 난징의 중산릉에서만 열린 게 아니다. 그가 1925년 간암으로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은 베이징(北京)이다. 톈안먼(天安門) 옆 중산(中山)공원에서도 90주기 행사가 진행됐다. 그의 고향인 광둥(廣東)성에서는 이날 대형 교향곡 공연인 ‘쑨중산’이 TV로 방영됐다. 고향집이 있는 중산(中山)시에서도 추모 행사가 열렸다.
대만에서도 추모식이 거행했다. 국민당은 이날 타이베이(臺北)의 쑨중산기념관에서 수천명의 각계 대표들과 함께 90주기 행사를 열었다. 이들은 쑨원의 동상에 헌화하고 허리를 3번 숙였다. ‘국부(國父)기념가’도 울려 퍼졌다.
각종 문화행사들도 이어졌다. 타이베이에선‘서예와 항전(抗戰)-양안 100명 서예가 공익전’과 ‘2015년 양안 연합 서예 그림전’이 개막됐다. 쑨원과 마지막 부인 쑹칭링(宋慶齡)을 함께 기리는 ‘쑨중산과 쑹칭링 학술 강연회 및 특별전’도 타이베이에서 열렸다. 두 사람이 27살의 나이차와 집안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게 딱 100년전인 1915년이다. 두 사람은 10년 밖에 함께 살지 못했지만 중국공산당은 쑹칭링을 ‘중화인민공화국명예주석’으로 예우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아버지가 살았던 베이징의 저택에서 살게 했고, 지금도 톈안먼과 멀지 않은 이곳을 쑹칭링 옛집 박물관으로 꾸며 놨다. 중국은 쑨원의 유지가 혁명 동지적 결합을 한 쑹칭링을 통해 중국공산당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과 대만이 하나같이 쑨원의 90주기를 기리고 있는 것은 ‘중화 진흥’과 ‘중국 통일’이란 그의 꿈이 여전히 14억명 양안(兩岸) 중화인의 소망으로 가슴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대만에선 그를 국부로 존경하고 있고, 중국공산당도 그를 위대한 애국주의자, 민족의 영웅, 중국민주혁명의 위대한 선구자로 평가하며 영원히 계승하고 발양시켜야 할 소중한 정신 유산으로 삼고 있다.
친중국 국민당에 대만 민심 돌아서
쑨원을 매개로 한 양안 관계는 실제로 2008년 국민당이 집권하고 마잉주 총통이 취임, 친중국 노선을 걸으며 급진전을 이뤄왔다. 통상 통항 통신 등 마 총통의 대삼통(大三通) 정책에 따라 양안 주요 도시간 직항 노선들이 개설된 뒤 왕래도 크게 증가했다. 2010년에는 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ECFA)가 발효되며 경제 통합까지 시도하게 됐다. 급기야 지난해 2월엔 양안 분단 이후 65년 만에 처음으로 양국 장관급 회담도 열렸다. 당시 왕위치(王郁琦)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은 중산릉을 찾아 “양안인은 모두 중화인이고, 쑨원 사상은 양안의 공동 자산”이라고 외쳤다. 지난해말에는 쑨원 90주기를 기회로 양안 정상회담이 벌어질 수 있다는 기대도 나왔다.
그러나 마 총통의 지나친 친중국 행보는 반발을 불렀다. 대만 민심 사이에선 점점 경제가 중국에 빨려 들어가고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우려감이 증폭됐다. 대만 국내총생산(GDP)은 이미 40%이상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에 반대하는 대만 대학생과 시민들이 입법원(국회)과 행정원(정부) 청사를 20여일동안 점거하며 시위를 벌인 것은 이러한 반(反)중국 기류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서비스무역협정은 ECFA의 후속 조치 중 핵심으로 전자상거래, 금융, 의료, 통신, 여행, 문화창작 등 서비스 시장의 상호 개방이 그 골자다. 대만 학생들은 서비스무역협정이 체결될 경우 일자리를 구하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도 대만인들에겐 중국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2016년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후보를 사실상 친중국 애국 인사로 제한한 데 반발해 일어난 홍콩 학생들과 시민들의 민주화 거리 점거 시위는 무려 79일 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 중앙 정부는 이에 대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중국이 말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ㆍ한나라 두체제)란‘양제’가 아니라 ‘일국’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대만인은 홍콩을 보면서 일국양제가 실제론 대만과 홍콩을 흡수하기 위한 중국의 허울 좋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됐다. 일국양제 아래 중국과 대만이 통일될 경우 결국 홍콩처럼 모든 결정권은 중국에게 넘어가고 대만은 사라질 것이란 우려가 대만의 민심을 지배했다.
이러한 반중국 정서는 지난해 11월 대만 사상 최대 지방선거에서 국민당 참패로 이어졌다. 주요 시장과 시 의원, 이장과 구민 대표 등 총 9종의 지방 대표 1만1,130명을 한꺼번에 뽑은 ‘지우허이(九合一) 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은 6대 직할시 중 단 1곳의 시장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반면 대만 독립 등을 주장해 온 민진당은 4곳에서 승리했고 나머지 1곳도 민진당이 지지하는 무소속 후보가 뽑혔다. 결국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마 총통은 겸임해온 국민당 주석직을 내 놨다. 그 동안 지방 선거의 승패가 그대로 대선까지 이어진 점을 감안하면 내년 1월 치러지는 대만 총통 선거에서도 민진당 후보가 승리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상태다. 이 경우 양안 관계는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이 집권했던 2000~08년의 긴장 관계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시진핑 ‘대만 독립’ 경고, 양안 냉각기로
중국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중국은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집권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4대 확고부동 원칙’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는 지난 4일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12기3차회의에서 “흔들리지 않고 평화 발전의 길을 가야 하며, 흔들리지 않고 공동의 정치 기초를 견지해야 하고, 흔들리지 않고 양안 동포의 복지를 도모해야 하며, 흔들리지 않고 민족의 부흥을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대륙과 대만은 하나의 중국에 속한다는 ‘92공동인식(컨센서스)’만 견지한다면 대만의 어떤 정당 및 단체와 교류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분열 세력은 양안 평화발전의 최대 장애이자 최대위협으로 결연히 반대하고 고도로 경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사실상 민진당이 집권할 경우를 상정한 사실상의 경고로 풀이된다. 중화 통일의 대장정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날 중산릉에서 만난 20대 연인은 “오늘이 쑨중산 선생의 90주기인 줄 몰랐다”며 “풍광이 좋다고 해 여행을 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양안 통일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되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난징=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