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환경 갈수록 악화"… 작가들 인세만으로 생활 못 해
"독립장르로 인정해야"… 나이 상관없이 통할 수 있는 분야
한국 그림책들이 ‘그림책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볼로냐아동도서전의 라가치상 전 부문을 석권했다는 소식은 쾌거다. 한국은 2004년부터 대상 1편을 비롯해 여러 차례 라가치 수상작을 냈지만, 전 부문에 입상하기는 처음이다. 픽션, 논픽션, 뉴호라이즌, 오페라프리마, 북&시즈의 5개 부문에서 총 6종이 모두 우수상을 받았다. 설 연휴에 날아든 낭보에 그림책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다들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번 성과는 거의 기적이라고 할 만큼 국내 그림책 환경이 나쁘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장르보다 공을 많이 들여야 만들 수 있는 게 그림책이지만, 사회적 인식이 낮고 창작 지원도 거의 없어 그야말로 고군분투의 연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가치상 석권이라는 눈부신 성취가 지속될 수 있을까. 오히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고꾸라지는 건 아닐까.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전문가들을 초대해 좌담을 마련했다. 최근 서울 합정동의 그림책 작가 교육장에서 진행된 좌담에는 2015 볼로냐아동도서전의 라가치 우수상 작가 박연철, 김장성,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된 유준재 작가, 김진 사계절출판사 그림책팀장, 김서정 KBBY(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지부) 대표가 참석해 2시간 동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 라가치 수상작가 중 한 명인 박연철씨가 말문을 열었다. 수상작 ‘떼루떼루’(시공주니어 발행)를 비롯해 ‘망태할아버지가 온다’ ‘피노키오는 왜 엄펑소니를 꿀꺽했을까’ 등 걸작을 낸 작가다.
박연철=“그림책 제작 환경이 더 나빠졌어요. 예전엔 초판을 보통 3,000부 인쇄했는데 요즘은 2,000부가 평균이에요. 재쇄 들어가면 더 줄어서 500~1,000부가 고작이죠.“
김서정=“아직도 어린이책은 호황인 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최근 5년 사이 엄청 다운됐어요. 창작 그림책을 아주 많이 내는 출판사도 작가에게 나갈 인세가 없다는 소리가 작년부터 사방에서 들립니다. 이런 환경에서 라가치상 석권은 정말 놀라워요. 전세계 그림책 중 올해 라가치 수상작은 대상과 우수상 합쳐 24종인데, 한국이 6종이니 4분의 1을 차지한 거죠. 이번에 한국만큼 많이 수상작을 낸 나라는 프랑스뿐(대상 1편 포함 6종)이에요. 그런데 기쁘지 않고 어안이 벙벙해요. 이게 무슨 도움이 될까, 회의가 들기도 해요. 그림책 시장 부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보다 더 기운이 팍 꺾일 테니까요.”
김진=“한국문학번역원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어린이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겠다고 하던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김서정=“진흥원은 그림책, 번역원은 동화나 청소년소설을 지원하는 쪽으로 가는 듯해요. 번역원은 2009년부터 볼로냐도서전에 참가해 어린이책 알리기에 나섰고, 진흥원은 그림책에 주력해 해외 소개 사업을 지원하고요. 진흥원은 지난해 런던도서전 주빈국부터 시작해서 해외도서전 여러 곳에 부스를 차려 그림책을 전시하고 홍보해요. 저작권 상담에도 적극 나서려는 자세고요.“
박연철=“작가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부터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림책은 창작 지원도 못받아요. 몇 년 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서울문화재단에 지원을 신청했지만 안 됐어요. 지원 사업 항목에 아예 없다는 거에요. 저는 그림책을 ‘주워온 자식’ 이라고 불러요. 미술 쪽에서는 상업미술로 여겨 낮춰 보고, 문학 쪽에서는 겨우 몇 줄짜리 근본 없는 글이나 쓴다고 말하죠.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게 그림책이에요. 주워온 자식이 제일 효도하고 있는 셈이죠.“
유준재=“그림책 작가가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기는 어려워요. 글과 그림을 다 맡으면 10%, 그림만 그리면 6%의 인세를 받아요. 이 책에서 10%, 저 책에서 6% 식으로 여러 권을 내서 100%를 채우면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제가 100%가 거의 다 됐는데도 어려워요.“
김서정=“그림책을 독립장르로 인정하지 않는 게 제일 문제죠. 아동문학의 한 귀퉁이에 집어넣다 보니 아동도 아니고 문학도 아닌 것이, 개념도 시장도 애매해서 독자를 누구로 잡고 소통할지도 애매해요.”
김장성=“그림책은 예술적, 문화적, 교육적 가치가 있어요. 문화예술의 역량과 소양을 높여주는 장르라는 인식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386 세대가 한창 어린 자녀를 키우던 때는 그림책을 포함해 어린이책과 어린이문학이 활황이었지만, 그 애들이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된 지금은 어린이를 위한 기적의도서관에도 아이들이 많지 않아요.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이 그만큼 줄어든 거죠.
희망적인 풍경도 있어요. 성남에서 차상위계층 성인을 대상으로 그림책 만들기를 해본 적이 있어요. 자기 얘기를 직접 그림책으로 만드는 건데, 완성된 8쪽짜리 그림책을 보면서 삶의 보람과 자존감을 느끼더군요. 서울시도 어르신들 대상으로 올해 이런 프로그램을 시작해요.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그림책 활동이 여러 군데서 일어나고 있어요. 자기 삶을 문학적,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매체로서 그림책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거죠.“
김진=”아동문학이 활황이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은 평론의 힘이 컸어요. 그림책보다 주로 읽기책 위주였지만, 어린이도서연구회 같은 단체나 언론이 나서서 비평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동화작가들이 확 올라갔죠. 반면 그림책은 때를 잘못 만난 것 같아요. 평론 활동도 다뤄주는 매체도 거의 없으니까요. 그때 외국에서 좋은 그림책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걸 보고 자란 작가들이 뛰어난 역량으로 그림책을 만들고 있는데, 이를 받쳐줄 자본, 시장, 단체는 전부 후퇴한 거에요. “
김서정=“그림책을 아이들용으로만 보는 게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책 연구를 주로 유아교육과에서 하다 보니 교육학 관점에서 인성 함양과 교훈 같은 것만 신경써요. 하지만 어른 아이 상관 없이 각계각층 누구와도 통할 수 있는 게 그림책이에요. 그림책을 읽어주면 어른도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아요. 심리 치유 효과가 있는 거죠. 이건 병자나 군인에게도 해당돼요. 군대의 진중문고에도 그림책이 들어가야 합니다.“
김장성=“그림책이 사람을 살리기도 해요. 광주에서 그림책 운동하는 분에게 들은 얘깁니다. 그 분 남편이 대기업 퇴직 후 심한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을 결심했는데, 유서까지 써놨던 양반이 그림책을 두어권 읽어 줬더니 마음을 바꿨다는 거에요. 그날 이후 그분은 그림책은 축복이라며 간증하듯 늘 들고 다녀요.“
유준재=“그림책이 뭔지, 그림책 작가는 뭐하는 사람인지, 라가치상이 어떤 가치가 있는 건지 다들 잘 몰라요. 제가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됐는데, 주변에서 반응이 없어요. 아내조차 몰라요. 그럼 책 좀 팔리냐고 묻는 게 다였으니까요. 부모님도 잘 모르시고. 조카는 “삼촌은 왜 뽀로로 같은 건 못 만드냐”고 해요. 예술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죠.
‘그림책 작가는 1쇄 작가’라는 말이 있어요. 초판만 찍고 그만이니 남들은 책 나온지도 모른다는 거죠. 요즘은 학교나 도서관 같은 데서 더러 강연 요청이 들어와 그나마 생계에 보탬이 되는데, 제게는 이게 ‘인공호흡’ 같아요. 다음 책을 낼 수 있도록 숨을 불어넣는 거죠. 최소한 다음 책을 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작가에게 그런 희망도 없으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김서정=“문화정책으로, 복지 차원에서도 작가들이 일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그림책은 지원 대상 항목에 들어 있지도 않아요. 그런데도 라가치상 전 부문에서 상을 받은 거에요.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상을 받아옵니까. 그림책 작가들에게 상금이라도 많이 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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