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유생문화기획단 11명 "후배에 의미 있는 첫 기억 주자"
조선시대 유생들 대면식 재현… 신입생이 선배에 간식 대접하고
대학 생활의 시작을 축하받아 "음주 일색이던 문화 개선" 호평
“제가 좋아하는 초콜릿 쿠키를 바치오니 대학 생활을 잘 부탁드립니다.”
“오호, 이 귀하디 귀한 것을! 잘 먹겠소이다.”
8일 오후 서울 명륜동 성균관 동재는 유건(조선시대 유생들이 착용했던 모자)과 비취색 도포, 청금복(유생들의 교복) 등 조선시대 유생 복장 차림의 대학생들로 북적였다. 유건을 쓴 신입생 무리가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건네자 청금복을 입은 선배들도 정중하게 음식을 받았다. 이들은 각각 올해 성균관대에 입학한 2015학번 새내기와 선배들이다.
2010년 방영된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을 연상케 하는 이날 선후배 대면식은 조선시대 성균관의 신입생 환영회 격인 ‘신방례’를 재현한 것. 과거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입학한 ‘신래’(신입생)가 ‘선진’(재학생)에게 주전부리를 대접하고 축하를 받는 일종의 신고식이다.
600년 만에 재현된 행사는 성대 재학생 11명이 모인 ‘유생문화기획단’이 의기투합해 성사됐다. 술판이 벌어지고 군기잡기가 유행하는 요즘 환영회를 지양하고 이제 막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의미 있는 첫 기억을 남겨 주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신방례. 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도 학문을 대하는 선조들의 참된 자세를 전달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시작은 지난해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금이 과거를 치르는 성균관 유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학문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감귤을 나눠줬던 ‘황감제’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행사를 가진 것. 유생문화기획단은 고교 3학년 수험생들에게 감귤을 나눠주며 ‘수능대박’을 기원했고, 학교 안팎에서 호평이 잇따랐다. 박광영 성균관 의례부장은 “음주 일색이었던 대학 문화가 개선되는 것 같아 흐뭇하다. 대학이 신방례를 공식 신입생 환영회로 시행하면 좋을 거 같다”며 적극 지원 의사를 밝혔다.
이날 행사는 600년 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새내기들은 과거 유생들이 그랬듯 성균관 대성전 앞에서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에게 학업의 시작을 알리는 ‘알성례’와 선후배가 ‘읍(허리를 숙여 하는 인사)’을 하며 정식으로 대면하는 ‘상읍례’도 치렀다.
참가 학생들도 전통 복장의 고운 빛깔과 경건한 의식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신입생 최유진(20ㆍ사회과학계열)씨는 “친해진다는 이유로 술을 강권하는 환영회를 걱정했는데 소속 대학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어를 배우러 온 네덜란드 교환학생 룩 반 레이윈(22)씨도 “외국에는 없는 한국의 끈끈한 선후배 관계가 인상 깊었다”고 호평했다.
기획단은 여론의 지탄을 받는 대학 음주문화도 전통 방식으로 개선할 계획이다. 우선 5월 축제기간에 선보일 학생주점을 선비의 음주예법인 ‘향음주례’를 적용해 운영하기로 했다. 기획단장 민신홍(26ㆍ경영학과)씨는 “절제된 음주문화는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꼭 필요하다”며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행사를 앞으로도 개발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다른 대학들도 학기초 환영회 풍경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숙명여대는 지난 1월 틀에 박힌 천편일률적인 술자리 대신 재학생 선배들이 수강신청 잘하는 법, 학교 근처 지름길 활용법 등 ‘학교생활 꿀팁’을 전수하며 환영회를 개최했다. 2일 대전 대덕대에서는 절주 동아리 ‘절주가락(節酒可樂)’을 중심으로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비누 장미꽃을 선물하며 입학을 축하했다.
이 같은 자정 노력이 나오는 것은 과도한 음주 때문에 사건ㆍ사고로 얼룩지곤 하는 환영회 문화가 위험수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에도 전남 화순에서 한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했던 여대생이 게임 벌칙으로 술을 마셨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급기야 교육부는 5일 새 학기 ‘엠티’(MTㆍ대학생 수련여행) 철을 맞아 전국 대학에 음주 등 가혹행위를 자제할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전달하기도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마시는 술과 장기자랑 등 가혹행위 관련 민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며 “건전한 환영회 문화 정착을 위해 각 대학의 노력이 시급하다”고 당부했다.
장재진기자 blan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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