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잃어버린 영국 하층 청년
제조업 몰락 저임금 서비스 양산
16~24세 청년 실업률 14.4%
무력감에 빠진 일본의 청년들
사회 불만도는 英ㆍ美에 20% 높아
35세 이하 절반 국민연금 안 내
지난달 개봉해 관객 400만명 이상을 동원한 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는 서로 다른 계급의 두 영국 남성이 등장한다. 베테랑 비밀정보요원은 맞춤 정장과 절도 있는 동작, 세련된 화술을 갖춘 귀족출신이다. 반면 신참내기 비밀정보요원은 노동 계급 출신으로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고 항상 삐딱하게 야구모자를 쓴 채 건들거리며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소동을 일으킨다. 그의 행동반경은 지저분한 펍과 사고칠 때면 들락거리는 경찰서 정도. 교육 수준도 낮은데다 한번도 직업은 가져본 적이 없다. 영화는 내내 두 계급의 상이한 모습을 강조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청년을 영국에서는 흔히 ‘차브(Chav)’라고 부른다. 차브는 19세기 ‘어린이’를 의미하는 집시언어에서 유래됐지만 지금은 ‘더러운 공영주택에 살면서 정부의 복지예산을 축내는 소비적인 하층계급과 그들의 폭력적인 자녀’를 뜻한다. 영국의 대중매체들은 이들의 패션으로 트레이닝복, 버버리 야구모자, 눈에 띄는 모조 금 악세사리 등을 든다. 또한 차브들은 흔히 반사회적이고 게으르며 10대 때 부모가 되고, 천박한 소비성향을 가졌다는 지탄을 받는다.
영국 구조적 모순의 상징 차브
영국 주류사회는 차브에 대해 그야말로 가차없는 혐오를 표출한다. 1980년대부터 대중매체에서는 차브를 비웃고 괴롭히는 보도와 프로그램이 보편적이다. 언론은 노동계급 가정에서 발생한 엽기적인 사건에 대해 ‘자격이 없는 차브 부모’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바쁘다. 영국 유명 TV프로그램인 ‘제레미 카일 토크쇼’에서는 매주 노동 계급 출신으로 뭔가 문제를 가진 일반인들이 게스트로 나와 토크쇼 내내 이들이 얼마나 ‘정상이 아닌지’를 까발리는데 집중한다. 차브가 많이 사는 지역들을 중심으로 ‘영국에서 가장 살기 나쁜 동네’를 선정하는 인터넷 사이트(www.ilivehere.co.uk/)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차브에 대한 혐오가 뿌리깊은 불평등의 산물로,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악마화시킨 결과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1979년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이 정권을 잡은 후부터 영국 노동계급의 기반이었던 제조업과 광산업이 몰락하고 노동조합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제조업이 몰락한 자리는 슈퍼마켓과 같은 저임금의 서비스업으로 대체됐는데 이마저도 일자리는 충분치 않았고 노조도 힘을 잃었다. 대처가 공영주택 세입자에게 집을 살 권리를 주는 제도인 구매권을 도입하자, 형편이 그나마 나은 가정들이 집을 팔고 떠나면서 공영주택엔 어느새 극빈 가구들이 모이게 됐다. 이 주택들은 차브 집단의 형성과 연결됐고 영국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분리는 더욱 심화됐다. 1996년 하위 10%의 세 자녀 가구 소득은 1979년보다 625파운드가 줄었으며 1979년 500만명이었던 빈곤층은 1992년 1,400만명으로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하층 노동계급이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2000년대 영국의 상위 15%의 똑똑한 아이들은 하위 40%의 똑똑한 아이들보다 대학 진학률이 7배나 높았는데 이는 1990년대 중반 두 집단 차이가 6배였던 것보다 더 커진 것이다. 2002년 캠브리지 학생의 5.4%, 옥스퍼드 학생의 5.8%가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이 낮은 지역 출신이지만 2008년에는 그 수치가 각각 3.7%, 2.7%로 뚝 떨어졌다. 게다가 최근 양질의 일자리로 볼 수 있는 정직원 채용의 경우 ‘채용 전 인턴’제도가 확대되면서 하층 노동계급 젊은이들의 사회진출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 이들은 급여 없는 인턴기간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차브 혐오’는 바로 구조적 문제 때문에 실직자로 거리에 내몰리거나 질 낮은 일자리에 종사해야 하는 하층 노동 계급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는 대신 이들의 일탈행위를 손가락질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젊은이의 좌절은 비단 하층 노동계급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반적인 영국 젊은이들의 삶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는 ‘영국데이터서비스’가 보유한 80만 가구를 대상으로 지난 50년간의 소득 분배 자료 분석 결과를 공개했는데 영국의 20대의 생활수준은 지난 35년 동안 ‘평균 이상’에서 ‘평균 이하’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20~25세 사이 영국 젊은이들의 주거 비용을 제외한 평균 소득은 전체 평균 소득에서 상위 40%안에 속할 정도로 높았으나 2012~2013년 같은 연령대의 젊은이들의 주거 비용 제외 평균 소득은 전체 인구 하위 37%를 조금 상회하는 정도에 그쳤다.
영국 젊은층 실업률 역시 전체 평균의 3배에 달할 정도로 치솟았다. 지난달 가디언은 정규 교육을 받거나 근로 상태가 아닌 16~24세 젊은이들이 지난해 4분기에만 8,000명이 늘었다는 영국 노동당 하원 도서관의 분석 결과를 밝혔다. 전체 평균 실업률이 5.7%인데 반해 이 연령대의 실업률은 14.4%로, 이는 1992년 이후 20년 만에 최대 격차였다.
일본 젊은이는 희망마저 박탈
영국에서는 젊은이들의 팍팍한 삶이 ‘차브’라는 돌출적인 존재로 드러낸다면 일본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등장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최근 몇 년 새 뚜렷이 증가한 것이다. 지난해 일본 내각부가 발표한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 조사’에서 20대의 생활만족도는 78.4%로 나타나 2010년 생활만족도인 70.5% 보다도 훨씬 증가했다. 하지만 일본 역시 젊은층 대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도 저조한데다 급속도로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듯 나라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은데 젊은이들은 행복한 기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사토리 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은 흔히 거창한 야망이 없고 안분지족하는 이들로 그려진다. 이들은 유니클로나 자라 같은 저렴한 패스트패션 브랜드에서 옷을 사고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런치세트를 먹으며 친구와 수다를 떤다. 집에서는 유튜브를 보거나 스카이프로 친구와 채팅을 하고 가구는 패스트 리빙 브랜드인 이케아 등에서 구입한다. 밤에는 친구 집에서 식사를 하며 반주하는 정도다. 모든 관계들 중 ‘친구’가 가장 중요하며 과거 자신의 부모와 선배 세대가 열광했던 명품과 자동차 구입에는 관심이 없다.
사토리 세대는 소박한 자신의 삶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걸까? 좀더 거시적인 질문에서는 완전히 다른 답변이 나온다. 2000년 일본청년연구소의 국제비교조사에서 “21세기는 인류에게 희망으로 가득 찬 사회가 될 것이다”라는 말에 62.1%의 젊은이들이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2008년 세계 청년 의식조사에 따르면 일본 젊은이들의 자국 사회 만족도는 43.9%로, 미국과 영국 젊은이들이 각각 67.6%, 61.2%로 나타난 것과 비교하면 20% 가량 낮다. 정치적 무력감은 더 커서 ‘자신의 힘으로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의 비율은 미국의 2배인 80%에 달한다. 다시 개인의 문제로 돌아가보면 2010년 “평소 생활하면서 고민이나 불안을 느낀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20대의 63.1%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 수치는 1980년대 후반 40%였지만 거품경제가 붕괴한 1990년대 전반부터 상승한 것이다. 국가의 미래에 대한 불신은 직접 행동으로도 나타난다. 35세 이하 젊은이 중 약 절반이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지 않는다는 통계결과도 있다.
이러한 사토리 세대의 모순에 대해 전 교토대학교 오사와 마사치 교수는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고 대답한다”라며 “인간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때 ‘지금 불행하다’고 느낀다고 답한다”고 말했다. 미래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사람이나 장래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지금 불행하다”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창 일본의 경제 성장이 지속되던 1970년대 20대의 생활 만족도는 50%에 불과했지만 사회 만족도는 1988년 거품경제 붕괴 직전 51.3%로 절정에 달했다. 이에 따르면 현재 사토리 세대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거두고 자신의 작은 세계에 집중하며 사는 것을 택한 셈이다.
안분지족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토리 세대의 미래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현재 많은 일본의 젊은이들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터’족이나 비정규직으로 살아간다. 일본에서는 굳이 정사원이 되지 않아도 혼자서 어느 정도 풍요로운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무리해서 정사원이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취약한 실업 대책과 주택 대책, 그리고 급속한 고령화는 향후 젊은이들에게 막중한 부담과 미비한 사회 보장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영국과 일본 전문가들은 자포자기한 젊은 세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복지 혜택을 줄이고 공공부문 민영화를 추진하려는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앤드류 해로프 영국 파비안 소사이어티 사무국장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새 정부는 완전 고용과 저임금 대책을 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며 “만약 정치인들이 선거 이후 복지 수당 삭감을 도입한다면 가난과 불평등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 증가할 것이다. 그런 영국의 미래를 과연 우리는 원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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