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물을 찾아가지 않으면 일주일 후 폐기처분 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통보를 받았다. 우편물이 쌓이고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학교 행정실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무심한 수신인을 나무라는 눈빛을 애써 피하며 한 뭉치를 건네 받았다. 스팸문자 마냥 대개 영양가 없는 홍보물이라 대수롭잖게 뒤적거리는데, 어라, 정체 모를 손 편지들이 눈에 띄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춘천과 서울남부, 대전의 교도소에서 발송된 편지들이었다. 수신인을 적는 곳엔 세세한 주소 대신, ‘경희대학교’만 덩그러니 쓰여 있었다. 예까지 찾아온 것이 용하다 싶다가도 익일 특급이나 등기로 보낸 걸 보면 어떤 절박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체국 직인은 각각 2013년 12월, 2014년 7월, 2014년 11월을 가리키고 있다. 무심한 수신인을 오래도록 원망했을 편지. 봉투를 뜯으려는데 연주 직전 대기실에서나 겪는 수전증이 도져 삐뚤거린다. 가장 오래 기다린 편지의 첫 인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일보에 게재된 에세이를 즐겨 보고 자주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낯선 편지들의 도착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지면 덕택이었던 것. 편지지 오른쪽 모퉁이에 자리 잡은 앙증맞은 에펠탑처럼 글씨체는 둥글고 차분했다. 그가 물어왔다. “‘고통은 영혼의 불침번’이라 하셨는데, 억울하게 들어와 징역을 사는 것도 그에 속하는 것일까요?” 애초에 그 문장은 소설가 최인호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었다. 맥락이야 고통스러운 감정의 동일시였겠지만, 내 엄살이 허풍은 아니었을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발신인이 절박하게 토로하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공허함,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외로움”에 뭐라 답할 수 있단 말인가. 마빡을 벽에 짓찧고 다니던 좌충우돌의 그 시기에 이 질문을 받았더라도 “고통은 영혼을 각성” 시킨다며 간단히 독려할 수 있었을까.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을까. 발신인은 사연을 마무리 하면서 “갑오년의 행복”을 기원해 주었다. 2013년 12월 29일의 편지였다. 한 해 건너뛰어 어느새 을미년. 미안함과 무안함이 범벅 되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음 편지는 암호 같은 문장 탓에 해독이 어려웠다. 5장을 빼곡히 채운 편지는 교도소의 식단부터 복용하고 있는 약물까지 두서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화라기 보단 독백이었다. 이런 하소연이라면 차라리 가벼운 마음으로 경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펼치니, 암호문과 같던 독백이 돌연 진지해졌다. “꼭 부탁 드리겠습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달라는 현실적인 조난 요청이었다. 벌금형으로 감면될 수 있다는 걸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미처 모르고 계신다 했다. 국선 변호사에 대한 불신도 드러내었다. 교도소 밖으로 보내는 편지는 인권 차원에서 비밀을 보장받지만, 교도소 안으로 들어오는 우편은 검열을 당하니 편지는 보내지 말라는 부탁도 덧붙였다. 부모님의 인적 사항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마지막 편지지를 손에 쥔 채, 나는 한참을 멍하니 방황했었다. 개입하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모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흘을 보냈다. 갈지 자 번뇌를 부여잡고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시골 어르신이니 되도록 간결하고도 명확히 전해야 한다는 강박에 유학시절 애용했던 방식대로 미리 대본을 써 준비했다. 허나 어르신의 음성 대신 ‘없는 번호’라는 기계식 안내가 들려왔다. 쿵쾅거리던 심장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1년이 훌쩍 지난 답장을 너그러이 헤아려 주길 바라는 것이 얼마나 뻔뻔한 일인지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감옥은 훌륭한 대학’이라던 신영복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창백한 관념을 건강히 깨쳐 나갈 수 있는 곳. 그렇게 대학에서 대학으로 이 편지를 띄운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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