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때만 되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얘기인데 뭐….”
광주에 사는 한 지인과 통화를 하다 천정배 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탈당 얘기가 나왔다. 이 지인은 “실종된 ‘광주 정신’을 복원하겠다”는 천 전 의원의 탈당 이유가 화제에 오르자 긴 한숨 끝에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천 전 의원은 오는 9일 광주에서 탈당과 함께 4ㆍ29 광주 서을 재선거 무소속 출마를 공식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새정치연합은 현재 경선을 앞두고 있고, 정의당과 옛 통합진보당은 독자후보를 내세울 예정이다. 대중적 진보정당을 표방한 국민모임도 마찬가지다. 어림잡아 야권후보가 5명은 족히 넘을 것 같다.
천 전 의원이 광주에서 국회 재입성을 노리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할 일이 아니다. 경기 안산 단원갑에서 15~18대 4선 의원을 지낸 그가 지역구를 광주로 바꾸는 건 개인의 자유다. 그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광주에 변호사 사무실을 냈고, 작년 7ㆍ30 광주 광산을 보궐선거를 적극 준비하기도 했었다.
사실 야당의 경우 텃밭인 호남에서 3선 정도 하면 대게 수도권으로 올라가 진검승부를 하라는 요구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고 해서 무슨 대수이겠는가. 호남에서 4,5선에 도전해선 안된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런 요구가 그다지 합리적인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다.
천 전 의원은 신기남 의원, 정동영 전 의원과 함께 한 때 ‘천신정’으로 불리던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인제 대세론’이 새천년민주당 내부를 압도할 때 가장 먼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손을 잡았다. 지금도 많은 야권 지지자들은 그를 깨끗하고 개혁적인, 정략을 앞세우지 않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가 ‘광주 정신’ 운운하는 것에 대해 광주시민들이 얼마나 공감할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도대체 뭣 때문에 선거 때만 되면 누구랄 것도 없이 이 얘길 하는 걸까.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미일 텐데, 당시 광주시민들의 민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슴 깊이 간직하겠다는 건가. 광주에서 당선되려면 당연하게도 5ㆍ18을 얘기해야 하기 때문일까.
천 전 의원이 말한 광주 정신은 도대체 뭘까. 그게 뭐길래 탈당까지 하는 걸까. 일각에선 친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탈당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새정치연합이 제대로 된 개혁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한 대목에 눈길이 간다. 아마도 천 전 의원에게 광주 정신은 민주주의이고 개혁인 모양이다.
광주 서을 재선거가 본격화하면 모든 정당과 후보가 광주 정신을 수도 없이 강조할 것이다. 그런데 2015년의 버거운 현실을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광주시민들에게 누가 한번 물어봤으면 좋겠다. 아마도 “그게 밥 먹여 주느냐”고 쏘아붙이는 경우가 많을 테고, 더러는 “광주 정신 좋아하네”라는 비아냥도 나올 것이다. 특히 질문자가 정치인이라면 거의 100%라고 봐도 될 거다.
광주시민들에게 ‘1980년 5월’은 35년째인 지금도 아픔이다. 물론 자랑스러운 ‘역사’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여기까지다. 광주시민들에게 민주화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픔을 누구도 딱 잘라 규정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역이고 광주시민들은 민주화의 투사이니 선거 때 ‘나’ 이외에 다른 후보를 찍어서는 안되는 건가. 수많은 정치인들이 지난 30여년간 그토록 광주를, 광주시민들을 팔아 뱃지 달았으면, 그 정도면 되지 않았나. 야권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쪼르르 광주로 내려가 세몰이를 하는 것도 이제는 보기 역겹다.
광주 서을 재선거에 출마하려는 정치인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제발 ‘광주 정신’ 운운하며 광주시민들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말라.”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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