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3월 5일자

“‘우리 사회에서 유례가 없는 유형의 젊은이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기성세대가 함께 생각해보자는 취지”였다고 최근 ‘달관(達觀)세대가 사는 법’이란 시리즈를 보도한 조선일보는 설명했다. “그들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면서다. 일단 의심되는 건 의도의 순수성이다. 젊은이가 저항을 포기하게 해야 기득권은 유지된다. 상존하던 일부 행태가 새 현상으로 둔갑한 배경일 테다. 사진은 갈무리된 2월 24일자 조선일보 11면.

달관은 세대 일반 현상이 아니다. 특수족(族) 행태다. 가난 감내 속에 예술은 배태돼 왔다. 청춘에 퍼진 건 포기다. 의도된 포장이 비극을 감춘다. 미래는 가짜 대안에 의해 쫓겨난다.

“돈 안 들이고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아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자는 주장을 이 지면에서도 여러 번 말했다. (…) 이런 삶의 방식과 태도를 굳이 함축하자면, 그래 ‘달관’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한 신문에서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진 젊은 사람의 사례를 나열한 뒤 ‘달관세대’라 묶는 기사를 썼다. 스스로 가지고 있던 방식과 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룬 기사를 보니 기분 나쁜 위화감이 들었다. 기사에서 언급된 “그들은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덕에 돈 없어도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많다고 말한다”와 같은 대목은 클리셰다.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여기며 군소리(라고 쓰고 ‘체제 비판적 언행’이라 읽는다)하지 말라는 거다. (…) 노후나 질병에 대해 생각하면 공포를 느낀다. 투병에 큰 비용이 드는 병에 걸리면 그냥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달관이라면 달관이다. 너무 높은 주거비 때문에 최악의 경우 노숙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차악은 (받아만 준다면)마당 쓸고 잡일하며 절에 머무는 것이다. 그럼 달관을 넘어 열반에 들 수도…. ‘달관세대’라는 말은 일본의 ‘사토리(さとり·깨달음)세대’를 따라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에 비해 고용이 안정돼 있고, 최저임금이 높다. (…) 그렇기에 일본의 ‘사토리’에서는 (비교적)행복의 기운이 느껴진다. 반면 한국의 달관에는 무기력과 체념이 더 강하다. 최근 ‘달관세대’ 기사는 이 같은 차이를 외면한 것이다. 정부· 여당· 재벌 등 기득권에 유리하게 이슈몰이를 해온 그 신문의 행보가 떠오르며 기사에서 불순함을 느낀다. 한국청년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든 즐겨보고자 하는 ‘정신승리’를 멋들어진 트렌드인 양 포장한 보도를 보고, 아마도 속으로 가장 흐뭇해 했을 사람은 기득권층이 아닐까. 지금 한국사회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달관이 필요한 사람은 기득권층이 필요하다. ‘달관세대’가 하는 정도의 달관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 그저 소유에 대한 욕심을 조금 줄여달라는 것이다. 한국에 사는 80%의 사람들에게 삐끗하면 추락해 맞닥뜨릴 ‘삶의 바닥’은 무저갱이다. (…) 기득권층의 푼돈이 서민들에게는 동아줄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 시스템을 꿈꾼다. 이것만큼은 나도 도저히 달관할 수 없다.”

-너부터 달관하세요(한국일보 ‘2030 세상보기’ㆍ최서윤 월간잉여 발행ㆍ편집인) ☞ 전문 보기

“2년 전 ‘각성이냐, 상실이냐’라는 칼럼을 이 지면에 썼다. 일본에서 화제였던 사토리족(悟り族)에 관한 글이었다. 사토리는 ‘깨달음’ ‘득도’를 의미하는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면서 안분지족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대개는 같은 지면에 같은 소재를 재론하지 않지만, 원칙을 한번 굽히려고 한다. 이제 와 사토리족 담론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뜨면서’ 현실을 기묘한 방식으로 왜곡하고 있어서다. 얼마 전 ‘조선일보’는 “‘달관세대’가 사는 법”이라는 특집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달관세대’란 사토리족의 ‘조선일보’식 표현이다. 이 시리즈의 문제는 너무 많아 ‘빨간 펜 첨삭’이 필요할 지경인데, 가장 심각한 오류를 두 가지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침소봉대’다. ‘“월100만원 벌어도 괜찮아” 덜 쓰고 잘 논다’ 기사는 어떤 젊은이의 하루 일과를 시간대별로 쪼개 어디에 얼마나 돈을 썼는지를 보여준다. (…) 과연 ‘조선일보’가 말하는 “적게 벌고 느긋하게 살아도 괜찮은” 사람들은 전체 젊은이들 중 몇 퍼센트나 될까. 또 하나 문제는 ‘맥락절단’이다. ‘조선일보’는 두 나라에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조건들의 차이를 태연히 무시한다. (…) 우선 두 나라의 최저임금부터 살펴보면, 2015년 한국 최저임금은 5580원이고 2014년 10월부터 적용된 일본 최저임금은 780엔(7250원)이다. (…)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김밥 프랜차이즈에서 파는 제육덮밥 가격은 2015년 2월 현재 4500원이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덮밥 프랜차이즈에서 파는 소고기덮밥 가격은 380엔, 우리 돈으로 3500원이다(작년 연말 300엔에서 380엔으로 인상). (…) 2014년 연말 기준으로 한국의 임금체불액은 1조3000억여원이었고 임금이 체불된 노동자 수는 무려 29만3000여명이었다. 반면 한국보다 훨씬 경제규모가 큰 나라인 일본의 임금체불액은 3000억원 선에 그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노동한다는 것은 받는 돈은 적고, 물가는 비싼데, 그나마 그 돈을 높은 확률로 떼인다는 걸 의미한다. 당신, 이래도 ‘달관’할 수 있는가? 한국의 젊은이들이 달관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필시 ‘체념’이거나 ‘포기’일 게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악을 써도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서, 그래서 눈을 감고 한숨을 쉬며 움직임을 끝내 멈춘 이들을 향해 “깨달음을 얻으셨네요”라고 말하는 건 얼마나 가학적인가. ‘조선일보’는 자족적인 삶을 사는 젊은이들 몇몇을 앞세워 이 끔찍한 사회를 만든 일말의 책임마저 벗어던지려 한다.”

-달관이냐 체념이냐(3월 3일자 한겨레 ‘야! 한국사회’ㆍ박권일 칼럼니스트)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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