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현재 20년 만에 새 편집국장을 임명하는 절차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말 사임 의사를 밝힌 앨런 러스브리저 편집국장은 올 여름까지만 직을 수행한다. 차기 편집국장은 기자들의 투표 후 가디언 소유주인 스콧 트러스트 이사회 의장이 임명한다. (투표 결과가 매우 중요하지만 반드시 1위한 사람이 임명되는 것은 아니다)
가디언은 편집국장 선출과정과 후보들의 출마의 변을 웹사이트에 공개하고 있다. 현재까지 4명의 후보가 출사표를 냈다. 이중 3명이 여성이고 남성 1명은 독일 출신이다. 여성 혹은 외국인 편집국장. 어느 쪽이든 가디언의 개방성과 다양성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낸 출마의 변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인 부분도 많다. 가장 중요한 화두는 역시 디지털 저널리즘이었다.
“여러분은 세계 최고의 저널리스트들”이라는, 부럽기 짝이 없는 말로 출마의 변을 시작한 에밀리 벨은 웹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업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개발자들을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의 온라인 편집장 출신인 볼프강 블라우는 편집국장의 역할에 대한 6가지 질문을 던진 후 이에 대한 자신의 대답과 디지털 저널리즘 강화 방안을 제시했다.
사실 가디언의 디지털 경쟁력은 이미 세계 언론사 중 최고 수준이다. 이를 이뤄낸 주역은 20년 동안 가디언을 이끈 러스브리저였다.
1975년 가디언에 입사한 그는 1995년 기자 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아 편집국장으로 선출됐다. 디지털 플랫폼에 대한 그의 선견지명과 성역 없는 보도에 대한 고집은 영국 안에서만 읽히던 종이신문 가디언을 매월 1억명의 전세계 사용자가 방문하는 세계 최고의 디지털 미디어로 변모시켰다.
2003년 이라크전 발발 당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는 ‘국익’을 고려해 전쟁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았고, 대량살상무기가 실제로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데도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가디언은 영국 정부의 참전을 비판하며 소신 보도를 고집했고 이를 디지털로 현장감 있게 전달했다. 미국과 해외의 많은 독자들이 가디언 웹사이트를 찾아 이라크전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러스브리저는 2006년 아예 ‘웹 퍼스트’(web first)를 선언했다. 아직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웹’이란 표현을 썼지만 세계 언론 중 가장 먼저 디지털 퍼스트를 선언한 셈이다.
한국에선 아직도 신문사 편집회의에서 종이신문 1면에 뭘 실을지를 가장 중요하게 논의하면서도, 디지털 플랫폼에 기사를 조금 일찍 내보내면 디지털 퍼스트인 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러스브리저는 9년 전부터 디지털 플랫폼에 최적화된 기사를 출고한 후 이중 일부를 골라 신문도 인쇄하는 디지털 중심주의를 추구했다.
물론 초창기에는 내부 반대도 많았다. 언제 어디서든 이슈에 대응해야 하므로 높아진 노동강도에 대한 불만도 컸다. 하지만 그는 기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필요성을 줄기차게 설득했다. 초창기 디지털 부문의 수익은 대부분 재투자했다.
디지털 퍼스트와 소신 보도로 급격히 높아진 가디언의 위상은 ‘위키리크스’ 외교문건과 에드워드 스노든의 미 국가안보국(NSA) 감청 폭로 등 세계적 특종을 가능케 했다. 제보자들이 가디언을 세계 언론 중 가장 신뢰할 수 있고 영향력 있는 매체로 여긴 것이다. 엄청난 수의 문건을 분류해 의미 있는 것을 선별하는 데도 디지털 기술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다.
러스브리저는 스노든 폭로 후 영국 정부통신본부(GCHQ)에 자료를 넘기지 않기 위해 하드디스크를 파기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영국 의회는 청문회에서 그를 추궁했지만 가디언에 대한 세계 독자들의 신뢰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러스브리저는 기술의 변화, 뉴스 소비자의 변화에 맞는 뉴스 콘텐츠의 제작과 유통의 필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편집국의 변화를 이끌어 나가는 리더십이야말로 공정보도에 대한 단호한 소신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 정론지를 이끄는 편집국장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임을 보여줬다. 그를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기자로서 존경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후임이 이끌어나갈 가디언도 세계 정론지가 주목하고 자극을 받을 만한 새로운 시도를 지속하길 기대한다.
최진주 디지털뉴스부 기자 parisco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