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서 기적 일군 미국
사실상 아마추어 수준 대표팀
프랭크 보기의 축구 인생
2군 야구팀 포수서 전향
손 유달리 커...골키퍼로 발탁
54년 대표 은퇴 후 장의사로 일해
85년 월드컵 역사의 최대 이변을 꼽는다면? 1966년 잉글랜드 대회 본선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꺾고 아시아 국가 최초로 8강에 진출한 북한의 선전?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개막전에서 아르헨티나를 꺾은 카메룬의 돌풍? 아니면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히딩크 신화’? 하지만 1950년 브라질 월드컵 예선에서 잉글랜드를 꺾은 미국의 경기는 이변이 아니라 기적 혹은 불가사의로 기억된다.
50년 대회는 잉글랜드의 월드컵 데뷔무대였다. 1930년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대회가 열린 지 20년이나 뒤에 잉글랜드가 출전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우선 FIFA가 월드컵을 만들면서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의 자존심을 흡족히 헤아려주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1회 대회는 당연히 영국에서 열려야 한다고 여겼던 잉글랜드로서는 ‘너무 멀다’는 이유로 출전을 거부한다. 그리곤 아예 FIFA를 탈퇴해버린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의 위상은 지금과 또 달랐다. 종주국의 상징적 권위 외에도 올림픽 3회(1900, 1908, 1912) 금메달의 위의(威儀)가 건재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A매치 전적에서도 23승 3무 4패를 기록 중이었다. FIFA는 끈질긴 구애로 잉글랜드의 다친 자존심을 달랬고, 급기야 지역 예선을 면제한 예외적 자동출전권으로 잉글랜드를 사실상 모신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종전 후 12년 만에 열린 50년 브라질 대회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국 가운데 하나였다.
결과는? 참담하게도 예선 리그 탈락이었다. 잉글랜드 축구의 씻을 수 없는 수모이자,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이변을 이끈 미국 대표팀의 수훈 선수는 단연 골키퍼 프랭크 보기(Frank Borghi)였다. 전후반 잉글랜드의 맹공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1대 0 승리를 지킨 그는 장의차 운전수로 일하며 주말에만 축구를 하던 준프로팀 선수였다. 그가 2월 2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전설의 주인공은 희뿌연 안개 속에서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존재할 때 더 신비롭고 매력적인 법이다. 프랭크 보기 역시, 그 존재는 월드컵과 미국 축구의 전설이지만 그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이는 미국 시민 중에도 많지 않다. 이유는 그가 펠레나 마라도나처럼 화려한 스트라이커가 아니었고, 미국 축구가 저 시합 이후 1990년대까지 국내에서나 국제무대에서나 별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기 자신의 겸손(어쩌면 정직) 때문이기도 했다.
50년 미국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진출 자체가 사실 이변이었다. 대표팀 17명의 평균 연령은 26.5세로, 대부분 기혼자였고 주말에만 축구를 하는 사실상 아마추어”(뉴욕타임스, 2015.2.4)였다. 대부분 준 프로팀 소속으로 주중에는 다른 일로 돈을 벌던 비(非) 전업 선수들이었던 거다. 월드컵에 진출하면 시민권을 준다는 조건으로 영입한 불법 체류자와 유학생, 중미 출신 선수도 있었다. 미국 대표팀이 진용을 갖춰 함께 훈련한 건 불과 열흘이었고, 유니폼조차 출국 직전 공항에서 지급될 정도였다.(italiansrus.com) 보기는 2011년 세인트루이스투데이 인터뷰에서 “당시 우리에겐 모두 직업이 있었다. 내 직업은 영구차 운전수였고, 우편배달부도 있었다”고 말했다.
예선 B조에는 잉글랜드와 미국 외에 강호 칠레와 스페인이 포진했다. 당시 FIFA는 조별 1위 팀에게만 토너먼트 진출 자격을 부여했고, 미국은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3대1로 패배, 사실상 예선 탈락 상태였다. 도박사들이 예상한 미국의 우승 확률은 1/500이었다.
6월 29일 오후 3시, 브라질 벨루오리젠티의 미네이랑 경기장. 칠레를 2대0으로 가볍게 꺾은 잉글랜드는 미국과의 경기에 노장 스트라이크 스탠리 매튜를 빼는 여유를 부리며 경기에 임했다. 싱거운 경기가 되리라 여겼던지 7만 명을 수용하는 스타디움에는 약 1만 명이 앉았다. 잉글랜드의 밉살스러운 거드름과 라이벌에 대한 경계심 등으로 브라질 관중들은 일방적으로 미국을 응원했다.
예상처럼, 경기도 일방적이었다. 잉글랜드는 초반 10여분 동안 6개의 슛을 날렸고, 그 중 2개가 골대를 때린다. 보기는 미국 팀에서 가장 바쁜 선수였다. 하지만 전반 32분, 모처럼 기회를 잡은 미국 수비수 월터 바가 미드필더에서 잉글랜드의 골대 왼쪽을 향해 회심을 슛을 날린다. 골키퍼가 공을 쳐냈고, 미국팀 중앙공격수 조 가에첸스(Joe Gaetjens)가 다이빙 헤딩으로 선제골을 넣는다. 가에첸스는 49년 아메리칸사커리그(ASL) 18골을 기록한 뉴욕 ‘브룩해턴(Brookhattan)’클럽 소속 스트라이커로, 월드컵 뒤 미국 시민권을 보장받은 아이티 국적 선수였다. 잉글랜드의 공격은 더 거세졌다.
후반 잉글랜드가 스무 개의 슈팅을 기록하는 동안 미국의 슈팅은 단 한 개에 그쳤다. 하지만 보기는 완벽하게 골 문을 지켜낸다. 경기 종료 직전인 후반 42분께 중앙수비수 찰리 콜롬보가 페널티 에어리어를 살짝 벗어난 지점에서 영국의 중앙공격수 스탠리 모텐슨을 백태클, 파울을 범한다. 프리킥을 받아 영국 선수가 헤딩을 했고, 프랭크 보기는 바운딩되며 골대로 흘러 드는 공을 가까스로 쳐낸다. 주심은 라인을 넘어갔다는 영국 팀의 주장을 묵살, 경기 종료 휘슬을 분다.
미국 팀의 승리가 확인되는 순간, 선수단 못지 않게 열광한 건 관중들이었다. 그 중 500여명은 4m 담장을 넘어 미국 선수들에게 몰려들었고, 어리둥절해있던 선수들 가운데 수훈자 보기와 가에첸스를 무등 태워 트랙을 따라 약 100m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상당수 영국 언론은(미국 일부 신문들조차) 로이터통신이 타전한 ‘1대0’ 경기 결과를 오보로 판단해 잉글랜드의 승리로 보도했고, ‘10대 0’ ‘10대 1’로 보도한 신문도 있었다고 한다. 패배가 확인된 뒤 영국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영국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오점”이라 썼고, 데일리메일은 “축구 역사상 최대의 이변”이라고 보도했다. 7월1일자 뉴욕타임스는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이 영국의 파트타임 야구팀에게 묵사발이 난 격”이라며 통쾌해했다.
프랭크 보기는 1925년 4월 9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더 힐’이라는 이탈리아인 거주지역에서 태어났다. 백인 아이들이 야구와 미식축구에 열광할 때, 또 가난한 흑인 청소년들이 농구나 권투 같은 돈이 되는‘블랙 스포츠’에 열광할 때, 더 힐의 아이들은 아버지들에게서 배운 축구를 했다. 동네 친구들은 훗날 지역 명문 세미프로 구단이었던 ‘심프킨 포드(Sompkins-Ford)’ 팀에 입단했고, 그들 중 무려 다섯 명이 50년 국가대표팀에 선발된다. 그러니까, 대표팀 훈련은 고작 열흘이었지만, 그들은 20년 넘게 교구 성당 마당에서 호흡을 맞춰온 셈이었다. 보기는 “지금도 추수 감사절이면 모든 교구민이 모여 축구 시합을 벌이곤 한다”고 말했다.
보기의 첫 종목은 야구였다. 2차 대전에 의무병으로 참전한 뒤 제대한 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2군 포수로 선수 생활을 한다. 2년 뒤 그가 야구를 그만두고 축구를 시작한 연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야구선수 시절에도 체력을 다지기 위해 겨울에는 축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그의 친구들이 심프킨 포드 팀에서 뛰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축구에 대한 미련과 친구들과의 우정이 적잖은 변수였던 듯하다.
입단 후 얼마간 미드필더로 뛰던 그는 당시 코치였던 조 누미(Joe Numi)에게 골키퍼를 해보면 안 되겠냐고 먼저 건의했다고 한다. “발 재간이 좋지 않아 패스도 제대로 못했다. 대신 내가 공은 잘 잡을 수 있고, 50야드 정도 던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고 그는 2009년 세인트루이스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당시 인터뷰에서 말했다. 준프로 구단이긴 하지만 48년과 50년 두 차례 US 오픈 컵을 차지한 명문 구단의 주전 미드필더였던 그가 패스를 제대로 못했다는 건 누가 봐도 지나친 겸손이었지만, 당시의 주전 골키퍼를 탐탁해 하지 않았던 코치는 그에게 기회를 준다.(위키피디어는 보기가 골킥을 직접 하지 않고 대부분 드로잉으로 공을 배급했다고 썼다.)
보기의 친구이자 50년 대표팀 동료로 훗날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팀 코치(74~88년)를 지낸 월터 바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인터뷰에서 “보기는 점프력과 기민한 순발력으로 골 에어리어 전역을 장악하면서 돌진해오는 상대팀 선수의 모든 움직임을 잡아내는 최고의 골키퍼였다”고 극찬했다. 바의 평가야 다분히 호의에 치우친 것일 테지만, 보기의 손이 남달리 커서 한 손으로 축구공을 예사로 쥘 정도였고 야구 덕인지 팔도 상대적으로 길었던 건 사실인 듯하다. 그의 키는 183cm였다.
또 하나의 사실은, 보기가 단 한번도 자신을 영웅 신화의 주인공으로 치장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미스터 사커’라는 별명의 세인트루이스 출신 축구해설가 빌 맥더모트는 “프랭크 보기는 과묵하고 조용한 말투를 지닌 완벽한 신사의 전형이었는데, 말수가 적은 대신 어투는 더없이 진실했다”고 말했다. 월터 바는 “누군가의 실수로 점수를 잃어도 프랭크는 불평하거나 비난한 적 없었고, 언제나 동료 선수들을 격려하곤 했다”고 말했다.(SI, 2015.2.3) 49년 그는 월터 바 등 더 힐의 친구이자 팀 동료 네 명과 함께 미국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2009년 인터뷰에서 “내가 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말했지만, 훗날 팀 동료들과 축구를 사랑했던 모든 미국 시민들은 보기가 자신들의 행운이라 여기게 된다.
당시 미국 대표팀이 과소평가된 팀이었다는 평도 있다. 3대1로 패한 스페인과의 개막전에서도 경기 종료 12분 전까지는 1대 0으로 우위를 지켰고, 월드컵 직전 잉글랜드 프로팀과 뉴욕에서 가진 친선경기에서도 대등한 경기를 펼치다 막판에야 한 골을 내줬다는 게 근거다. 하지만 보기는 2002년 AP 인터뷰에서 “시합 전 나는 승리는 고사하고 4,5점대 실점으로 막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다음날 재시합을 했다면 우리는 아마 10대0쯤으로 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잉글랜드는 53년 미국과의 친선 경기에서 6대3, 59년 8대1, 64년 10대0으로 앙갚음한다.)
미국과의 경기 패배 후유증 탓인지 잉글랜드는 칠레에게도 1대0으로 패배, 예선 탈락한다. 미국 역시 칠레에 5대2로 졌다. 이후 미국 축구는 1990년 대회 전까지 한번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프랭크 보기는 국가대표팀 주전으로 스위스 월드컵 지역예선(53년)까지 모두 9차례(월드컵 본선 3회 포함) A매치에 출전했고, 54년 은퇴한 뒤 고향에서 장의사로 일했다.
50년 미국 국가대표팀 선수 전원은 1976년 미국 축구 명예의전당에 헌액됐다 그들의 이야기는 2005년 데이비드 앤스포 감독에 의해 ‘The Game of Their Lives’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역으로 출연한 제라드 버틀러가 보기 역을 맡았다. 영화 시사회를 본 뒤 보기는 “내가 공을 막는 몇몇 장면은 미화됐다”며 겸연쩍어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2차대전 미 1공수 506낙하산연대 2대대 이지중대의 전투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마지막 회에는 노년의 주인공 리처드 딕 윈터스 소령과 손자의 인상적인 대화가 삽입돼 있다. 할아버지는 영웅이었느냐는 손자의 질문에 그는 “나는 영웅이 아니었고, 다만 영웅들과 함께 싸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프랭크 보기는 2011년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 인터뷰에서 그와 50년 대표팀의 전설에 대해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설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 시절 가장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뛰는 행운을 누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내 친구들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조 가예첸스는 50년 대회 이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53년 조국 아이티 대표팀 소속으로 5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 출전했다. 은퇴 후 아이티에서 축구 교실 등을 운영하던 그는 반정부활동을 하던 형제들의 영향으로 뒤발리에(1907~1971) 독재정권에 의해 64년 체포돼 정치범수용소에서 숨진 것으로 74년 공식 확인됐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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