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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조선의 부패방지법

입력
2015.02.2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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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쓴 ‘주뢰설(舟賂說)’이란 글이 있다. 짤막한 글이므로 전문을 인용한다.

‘이자(李子ㆍ이규보)’가 남쪽으로 강을 건너는데 두 배가 나란히 건너고 있었다. 두 배는 크기나 사공의 수가 같았고 말이나 사람의 수도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보니 한 배는 나는 듯이 달려서 이미 저쪽 언덕에 닿았는데 내가 탄 배는 오히려 머뭇거리고 빙 빙 돌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배 안에 있는 사람이 “저 배는 술이 있어서 사공에게 먹여 사공이 있는 힘을 다해서 노를 저었기 때문이오”라고 말했다. 나는 부끄러운 기색이 없을 수가 없어서, “오호라! 이 작은 거룻배 하나가 가는 데도 오히려 뇌물의 있고 없음에 따라 나아가는데 빠르고 늦음과 앞서고 뒤짐이 있는데 하물며 벼슬길의 바다를 건너는 경쟁은 어떠하겠는가? 내 손에 돈 한 푼 없었던 것을 되돌아보면 지금까지 관직에 대한 은명 하나를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구나”라고 탄식했다. 이를 적어 두었다가 훗날 보려고 한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주뢰설’)

이규보는 나중에 고구려 건국에 대한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은 고려의 문호가 되지만 젊은 시절에는 사마시(司馬試)에 세 번이나 낙방한 후 인저(仁?)라는 첫 이름까지 바꾸어야 했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 ‘연보(年譜)’에 따르면 스물두 살 때인 명종 19년(1189) 네 번째로 과거에 응시했을 때 꿈에 ‘28수(宿)’의 별자리를 가리키는 노인들을 만났다. 이인저가 급제 여부를 묻자 문운(文運)을 담당하는 ‘규성(奎星)’을 맡은 노인이 알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 노인이 “장원(壯元)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는데, 실제 급제하자 이름을 ‘규성에게 보답한다’는 뜻의 규보(奎報)로 고쳤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이규보가 벼슬에 나간 것은 41세 때였다. 과거 급제도 어려웠지만 실제 임용은 뇌물을 바친 자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부정부패에 대해서 대단히 엄격하게 처벌했던 것은 고려가 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뇌물죄를 ‘장물 장(贓)’ ‘더러울 오(汚)’자를 써서 장오죄(贓汚罪) 또는 장죄(贓罪)로 다스렸다. 역모 다음으로 엄하게 처벌했는데, 수뢰액수가 1관(貫ㆍ엽전 1,000문) 이하면 장(杖) 70대, 40관이면 장 100대에 도(徒ㆍ노역형) 3년이었고, 80관 이상이면 교형(絞刑ㆍ교수형)이었다. 이는 명나라의 형법인 ‘대명률(大明律)’을 따른 것인데, 현재 중국에서 부패 사범을 사형시키는 것은 이런 중국 전통의 법체계를 따르는 것이다.

조선은 부패 관리들을 처벌하고 그 명단을 ‘장안(贓案)’ 또는 ‘장오인녹안(贓汚人錄案)’에 적어서 따로 관리했다. ‘장안’에 등재되면 본인의 평생 벼슬길이 막히는 것은 물론 자손들도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다. 심지어 사위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장죄에 한 번 걸리면 딸의 혼삿길까지 막혔으니 말 그대로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사대부에게는 관대한 나라였지만 장죄는 달랐다. 성종 25년(1494) 하양(河陽)현감 김지(金漬)가 수세원(收稅員)으로 뽑힌 후 백성들로부터 면포(綿布) 66필(匹)과 종이 1,150권(卷)을 받은 혐의로 사형 당한 것처럼 부패에는 용서가 없었다.

조선은 장물이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도 엄격하게 따졌는데 부정하게 취득한 재물을 자신이 가졌으면 ‘입기(入己)’라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면 여인(與人)이라고 해서 경중을 가렸다. 중종 25년(1530) 국가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 봉사(奉常寺奉事) 이수함(李秀咸)이 제사에 쓰는 장(醬)을 자기 집에서 사사롭게 썼을 뿐만 아니라 관청 소유의 여종에게 자기 집 길쌈을 시키고 대가로 주었다가 장죄로 논죄되었다. 간장 몇 종지 때문에 자신과 후손들의 인생길이 망가진 것이었다. 세종 3년(1421) 이조판서였던 허지(許遲)는 “장물은 가짓수가 열 가지나 되는데 한 가지 물건이 발견되었다면 나머지도 모두 몰수하는 것입니다”라고 해서 한 뇌물이 발견되면 나머지 재산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란법이라고도 불리는 부패방지법에 대해 논란이 한창인데, 이 법처럼 여러 국회의원들이 그 부작용을 우려하며 질질 끄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물론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처럼 공직자가 아닌 경우도 포함되면서 적용 대상이 1,000만명이나 된다는 우려도 있지만 필자가 만나본 사람들 중 이 법에 떠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정권에 독립적이지 못한 현재의 검경 때문에 정권 차원의 악용을 우려하는 시각은 적지 않았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다는 전제 아래 이 법을 즉각 통과시키는 것이 한국 사회의 부패구조 해체에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지연시킬 경우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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