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 개혁 가장 시급
비정규직, 임금개편 중점 둬야
96년처럼 실기하지 말아야
“학생들 취직은 안 되지, 대학은 구조조정 한다고 난리지, 강의가 언제 폐지될지 몰라 가시방석입니다.”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후 몇 년 전 지방대 비정규직 전임 자리를 어렵게 구한 후배의 한숨은 깊었다. 지난 설 연휴 오랜 만에 만난 지인들 가운데 나이와 계층을 불문하고 일자리 걱정을 토로하지 않는 이가 드물었다. 비정규직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른바 과(過)보호를 받는다는 대기업 정규직도 구조조정의 칼바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회 전체가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의 불안정 상태에 빠져 있다면 과장일까.
집권 3년째를 맞은 박근혜 정부가 노동시장 개혁을 핵심 과제로 잡은 건 늦은 감이 있지만 올바른 방향이다. 박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노동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생존전략”이라고 강조했고, 이달 중순 노사정 대표를 만나 다음달까지 대타협을 이뤄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거의 20년 묵은 난제가 이렇게 단기간에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설령 타협안이 마련돼도 양대 노총 중 한국노총만의 참여로 얼마나 실행력이 있을지도 미지수다. 불참한 민노총은 4월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더욱이 노동시장 개혁은 당위성만으론 어림 없다는 게 역사적 경험이다. 경제가 밑바닥, 아니 파국 직전의 상황에 몰리기 전까지는 이해당사자 어느 쪽도 양보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1996년이 꼭 그랬다. 두 자릿수 임금 인상과 과잉 설비투자에 따른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몇 년째 고착되면서 국제경쟁력이 추락, 무역적자는 급증했지만 반도체 특수로 인한 착시 현상으로 여전히 흥청거릴 때였다. 문민정부는 그 해 말 정리해고를 담은 노동관계법을 개정했다.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에 달하는 현 비정규직 문제의 시초였다. 당시 노사간 견해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자 정리해고와 변형 근로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을 여당 단독으로 밀어붙였다가 야당과 노동계의 극심한 반발을 불렀다. 결국 야당과의 재협상을 통해 법을 무효화해야 했다. 하지만 똑같은 법이 IMF체제 하의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국회를 통과했다.
몇 년 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장은 아직도 뇌리에 선연하다. 국가 부도위기로 가는 걸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1년 반 전부터 추진한 노동법개정을 김대중씨가 반대해 그러지 못했다고 강변했다. 그렇게 중요한 입법이라면 왜 국민을 설득하고 야당의 동의를 끝까지 구하지 않았을까, 공허한 변명이었다.
그렇게 정리해고의 문이 활짝 열리자, 기업은 비용절감을 위해 비정규직과 인력 아웃소싱을 늘렸다. 노조를 등에 업은 정규직은 자신들의 이익 수호를 위해 바리케이드를 높이 쳤다. 그 결과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제 노동개혁 없이는 더 이상 경제문제를 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비정규직 문제로 이어지고 다시 청년실업 등 사회문제와 실타래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경제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에 동의하든 안 하든 고도성장기에나 적합했던 장시간 근로와 연공서열형 임금체계가 지식정보화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새로운 노동 패러다임이 필요하고, 그 변화의 출발점은 비정규직 대책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정규직 과보호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사측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주장하는 노동계의 간격이 멀다. 노사정 위원회가 지난해 말 ‘노동시장 구조개선 원칙과 방향’에 합의했지만 이후 별 다른 진전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리더십이다. 정부가 강력한 의지와 분명한 구상을 갖고 이해 당사자는 물론이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노동개혁 성공의 8할은 ‘소통’의 리더십에 달렸다. 사안의 엄중함을 볼 때 대통령부터 지금까지와는 달라져야 한다. 직접 나서 고통분담을 통한 상생, 비정규직과 청년들에 대한 희망의 공약수 마련을 끈질기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96년 당시 항간에선 “노동법을 개정하면 정권이 망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를 두려워해서도 안되고, 때를 놓쳐서는 더더욱 안 된다.
박진용 논설위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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