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 즐거운 비명, 소비세 면세품목 확대로 큰 혜택
中企 30만개 경영난 시달려, 수입 원자재가·생활물가 급등
지난 주말 일본 도쿄(東京) 신주쿠(新宿)의 대형 유통매장 빅클로. 일본의 대표적인 양판점 빅카메라와 의류매장 유니클로가 공동 운영하는 이 매장에 춘절을 맞아 일본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붐볐다.
40대 중국인 여성은 유니클로의 속옷 히트텍 50여장을 구입, 미리 챙겨 온 여행용 트렁크에 가득 채웠다. 빅카메라 매장에서는 중국인들이 대당 3만엔이 넘는 전기 밥솥을 4~5개씩 구입하는 진풍경이 빚어지기도 했다. 한 직원은 “이 제품 모두 중국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절반 이상 저렴하다”고 전했다. 도쿄 긴자(銀座)에 위치한 양판점 돈키호테는 중국어가 능통한 매장 직원들을 고용, 쇼핑 카트를 직접 끌고 다니며 중국인의 쇼핑을 돕기도 했다.
통 큰 쇼핑은 한국인 관광객도 예외가 아니었다. 설 연휴를 맞아 도쿄를 찾은 50대 한국 관광객은 빅카메라 유락초점에서 5만원대의 발모제를 대량 구매했다. 그는 “한국에서 10만원 이상에 거래되고 있어 몇 개만 구입하면 항공권 가격이 빠질 정도”라고 귀띔했다. 매장 관계자는 “발모제를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꺼번에 10개 이상 구매하는 고객이 적지 않아 최근에는 판매 개수를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제한 금융 완화 등을 기치로 내세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경제 정책 아베노믹스의 영향으로 일본 엔화 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씀씀이가 커지고 있다. 2, 3년전 1달러당 80엔대를 기록했던 엔화가치는 최근 1달러당 120엔대까지 떨어졌다. 원엔 환율도 3년 전 100엔당 1,400원에서 최근 900원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여기에 일본 정부가 지난해 10월부터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소비세(8%) 면세 품목을 기존 가전 가방 등에서 화장품 주류 식료품 의류 의약품 등으로 확대하면서 외국인이 느끼는 일본 물가는 더욱 떨어졌다.
엔저 순풍에 힘입어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도 급증하고 있다. 일본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여행객은 1,341만3,600만명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는 2013년 1,036만여명에 비해 30% 가량 늘어난 수치다. 나라별로는 대만이 282만명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275만명), 중국(240만명)의 순이었다. 올해 1월 일본 방문 외국인은 129만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9%나 증가했다. 이중 한국인은 35만명이 방일, 1위를 기록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964년 통계를 집계한 이후 단일 국가 방문객이 30만명을 넘은 것은 처음”이라며 “엔저에 면세품목을 확대한 영향이 크다”고 전했다. 외국인 관광객이 지난 한해 일본에서 쓴 돈은 2조305억엔으로, 1조4,167억엔을 기록한 전년 대비 43% 증가했다. 이 역시 역대 최대 수치다. 1인당 소비금액도 지난 해 대비 11% 증가한 15만1,374엔으로 나타났다. 특히 쇼핑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35%로, 처음으로 숙박비를 앞섰다.
매출급증 쇼핑객 잡기 안간힘
씀씀이가 커진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일본 유통업계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춘절 연휴기간인 18~20일 사흘간 미쓰코시 백화점 긴자점의 면세품 매출은 지난해 춘절 기간에 비해 3, 4배 늘어났다. 백화점 홍보팀 관계자는 “100만엔대의 보석류 등 고액 상품의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다”며 “매출 증가액은 기대 이상이어서 놀랍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중국인들의 쇼핑이 집중되는 온수 세정 변기를 제조하는 릭실은 지난해에 비해 제품 판매가 2배 이상 늘어나자 증산 체제를 갖추느라 분주하다.
일본 업계는 모처럼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나섰다. 한국의 부산과 후쿠오카(福岡)를 잇는 정기 여객선이 도착하는 후쿠오카시 하카타항 국제터미널은 지난해 10월부터 외국인 관광객이 면세점에서 구입한 상품을 출국 직전에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후쿠오카 시내 명품점, 식료품점, 약국 등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 귀국 일시를 알려주고 승선 전 구입 증명 서류를 제출하면 터미널까지 상품을 우송해주는 것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도입한 이 제도는 전국으로 확산돼 현재 빅카메라 등 여러 매장에서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하는 고객에게 공항까지 제품을 배달하고 있다.
지난해 처음으로 면세 품목에 포함된 화장품 업계도 외국인 관광객의 지갑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화장품 업체 핀클은 긴자에 있는 매장 면세품 판매코너에 2개국 이상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을 2배 가량 늘렸고 계산대 수도 증설했다. 시세이도는 외국인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인 홋카이도(北海道), 도쿄, 교토(京都) 등에 영어, 중국어, 태국어 등으로 상품을 소개하는 태블릿 단말기를 설치했다. 노에비아홀딩스는 올 여름 재취항을 앞둔 에어아시아재팬에 출자를 확정했다. 이 회사는 향후 에어아시아 객실 승무원을 상대로 자사 화장품을 이용하는 마케팅 전략을 통해 일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제품 홍보를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카시오, 시티즌홀딩스 등 시계업계도 메이드인 재팬을 선호하는 중국 관광객을 겨냥, 10만엔이 넘는 고가 손목시계의 일본 내 생산을 대폭 늘리기로 했다.
엔저의 그늘
엔저가 외국인 관광객과 일본 내 일부 유통업계에 수혜를 가져다 준 것과는 달리 일본 서민경제와 내수 위주 중소기업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엔저에 따른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식품, 제지 등 일용품 가격이 올 들어 일제히 상승했다. 지난 달부터 컵라면, 즉석면 가격이 3~8% 인상됐고, 가정용 냉동식품 30여개 품목의 가격도 3~15% 가량 올랐다. 다이오제지, 닛폰제지크레시아 등 수입 펄프를 원료로 사용하는 제지업계도 지난 달부터 티슈와 화장실 휴지 가격을 10% 가량 인상했다. 이밖에 파스타, 식용유, 콩기름, 수입와인, 압정 등 상당수 품목이 많게는 10% 가량 올랐다.
대형 식품업계 관계자는 “엔저의 장기화로 앞으로도 비용 상승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돼 냉동식품, 화장지 등의 추가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기업의 체감경기도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 데이코쿠 데이터뱅크(TDB)가 1만여개 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15년 국내경기동향을 악화할 것으로 예상한 기업이 전체의 26.8%로, 회복될 것이라는 응답(13.4%)의 2배 가량을 차지했다. 경기회복의 우려 요소(복수응답)로는 엔저가 50.6%로 가장 높았고, 원유 및 원자재 가격 상승(47.7%), 소비세(36.5%) 등이 뒤를 이었다.
엔저의 영향으로 인한 기업 도산도 잇따르고 있다. TDB에 따르면 2014년 엔화 약세의 타격으로 도산한 기업(부채 1,000만엔 이상)은 345개로 전년 130개에 비해 2.7배나 늘어났다. 이들 기업이 남긴 부채총액은 1,634억엔이나 된다. 업종별로는 운수 통신업이 96건, 도매업 80건, 제조업 66건 등의 순이었다.
TDB 관계자는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과 이에 따른 원자재 구입 가격 급등으로 중소 영세기업의 경영난이 가중되고 있다”며 “올 들어 도산이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미즈호은행은 엔화 가치가 10엔 떨어질 때마다 상장 기업의 영업이익은 1조7,000억엔 늘어나는 반면, 비상장기업의 영업이익은 8,000억엔 감소한다는 분석자료를 최근 내놓았다. 엔저의 수혜는 일부 수출주력 대기업에만 국한돼, 기업에도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도쿄 상공리서치 관계자는 “엔저 등 영향으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이 30만개에 달하며 이중 5만~6만개 업체가 파산 예비군에 속한다”고 내다봤다.
도쿄=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