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장례 사흘째 "대통령하면 뭐하나, 다 거품 같은 것"
"부인들 잘 쓰다듬어 주시오. 억만금 있으면 뭐해"
이회창 이희호 강창희 김현철 등 조문행렬 이어져
김종필(89) 전 국무총리는 부인 고(故) 박영옥(86) 여사의 장례 사흘째인 23일에도 빈소가 차려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오전 10시께 나와 조문객을 맞으며 '풍운아'로서의 정치역정에 얽힌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날도 '초당적' 조문행렬이 이어져 눈길을 끌었다.
◇이희호·이회창·YS차남 김현철씨 조문 =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이날 정오께 'DJ 비서실장 출신' 새정치연합 박지원 전 원내대표, 윤철구 김대중평화재단 사무총장의 부축을 받으며 직접 조문했다.
이 여사는 "(고인이 된) 여사님이 덕이 좋았다. 몇 번 만나뵙고 선거 때는 같이 다니기도 했다"고 고인을 회고했고, 김 전 총리는 "건강하셔야 한다. 가신 어른 분까지 더 오래 사셔야 한다"고 말했다.
박 전 원내대표는 "(이 여사가) 좀처럼 빈소를 안찾으시는데 직접 가셔야겠다고 해서 모시고 왔다"고 했다. 김 전 총리는 박 전 원내대표에게 "참 꾸준하게 가신 어른 보태 드리고(도와드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잘한다). 보통 말로 상식 위에 있는 분 같다"고 덕담하고 이 여사의 방북계획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눴다.
1997년 대선때 'DJP 연합'으로 패했던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도 서먹했던 JP를 찾아 10여분간 빈소에 머물며 위로해 눈길을 끌었다. 이 전 총재는 "뭐라 드릴 말씀이…"라고 위로하며 "(직접) 뵈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건강하시다. 건강에 유념하시고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김 전 총리가 "국내에 계셨나. 운동은 뭐 하세요"라고 근황을 묻자, 이 전 총재는 "집에서 책이나 보고 칩거하고 있었다. 매일 헬스장에 가서 요즘 열심히 몸의 균형을 다시 찾는 운동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전 총재는 조문 후 기자들과 만나 JP와의 서먹했던 관계에 대해 "그건 다 알려져 있는 것 아닙니까. 정치에서 만나뵙고 여러가지 있었지만 정치라는 것은 지나면 다 남가일몽(南柯一夢.남쪽 나뭇가지에 걸린 꿈이란 말로 인생의 덧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말했다.
폐렴으로 입퇴원을 반복해 온 김영삼(YS) 전 대통령 대신 조문 온 차남 현철씨는 "아버님께서 많이 좋아지셨다. 말씀도 곧잘 하시고 식사가 조금 불편하다"고 근황을 전한 뒤 "찾아뵙지 못하신다고 전해드리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또 "아버님께서 퇴임하신 이후에 부부동반해서 식사도 하고 잘 지내셨는데…"라고 고인을 회고하며 "사실 제 어머님께서도 여사님이 건강하신줄 알았는데 이번에 많이 놀라셨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김대중 정부에서 자민련몫으로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냈다가 내각제 포기 등을 둘러싸고 JP와 충돌해 자민련에서 나왔던 강창희 전 국회의장도 빈소를 찾아 "총리께서 사모님을 많이 사랑하셨잖아요. 금실 좋은 것 다 아는 거지요. 저희들이 이제 더 자주 찾아뵙겠다"고 했다.
조문객으로 정홍원 이수성 전 총리,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박희태 전 국회의장과 안희정 충남지사, 박병석 전 국회부의장, 조일현 전 의원, 벳쇼 고로 주한일본대사, 선준영 전 유엔대표부 대사가 빈소를 찾았다. 또 김 전 총리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알려진 하춘화 씨 등 각계 인사들도 모습을 보였다.
김 전 총리가 하씨에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노래를 부를 때 변함이 없다"고 하자, 하씨는 "예전에 총재님께서 좋아하는 가수가 하춘화라고 해서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웃었다.
◇'정치는 허업' 거듭 강조…우스갯소리에 좌중 웃음 = 김 전 총리는 이날 조문객과 대화 도중 '정치는 허업'이라는 지론에 대해 "내가 왜 정치는 허업이라 했는지 해석을 잘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자세한 풀이를 내놨다.
그는 "정치는 키워서 가꿔 열매가 있으면 국민이 나눠갖지 자기한테 오는 게 없으니 정치인 자신에겐 텅텅 빈 허업이고 죽을 땐 '남는 게 있어야지'라고 한탄하면서 죽는거다. 근데 국민에게 나눠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라는 말이야.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고 그러면 교도소밖에 갈 길이 없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이 안심하고 여유있게 희망을 갖고 살면 자기가 그걸 도와주고 만든 거고 그걸로 만족해야지, 나도 그렇게 되길 원하는 건 정치인이 아니지"라고 덧붙였다.
또 "내가 우스갯소리를 좀 할까"라며 "인간이 어떻게 하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느냐. 미운사람 죽는 걸 확인하고 죽을때까지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있다가 편안히 숨 거두는 사람이 승자야"라며 엄지를 치켜세워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그는 "대통령하면 뭐하나. 다 거품같은거지"라며 "천생 소신대로 살고, 자기 기준에서 못했다고 보이는 사람 죽는 거 확인하고, 거기서 또 자기 살 길을 세워서, 그렇게 편안하게 살다 가는 게 (승자)"라며 거듭 엄지를 치켜세웠다.
한 조문객이 "대통령은 5년 계약직"이라고 하자, 김 전 총리는 "책임 안 지고…"라고 공감하며 "(나는) 5년 단임제 하지 말라고 그러다가 정계에서 쫓겨났잖아"라며 내각제에 대한 소신을 강조했다.
한편 김 전 총리는 이날 더욱 부인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 전 총리는 "어제 입관하는데 (아내가) 부끄럽다고 안 하고, 아프다고도 안 하고 허망하더라"며 "이리 되니까 생전에 잘 못 해준 게 후회된다. 근데 사후에 후회하면 뭘해. 그런 의미에서 잘하라고…"라고 주위에 말했다.
또 "가니까 여러가지가 느껴져요. 아직도 내 옆에 있는 것 같아요. 묻고 돌아와서 그 사람이 쓰던 방을 들여다볼 때 정말 슬플 것 같아요"라며 "부인들 잘 쓰다듬어주시오. 아무 소용 없어. 억만 금이 있으면 뭐해"라고 말했다.
yjkim84@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