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표 대신 공연표로 문화생활… 본가 방문·성묘 미리 끝내고
호텔서 연휴 보내는 젊은 부부 등 자발적 귀향 포기자 늘어나
명절 '가족 통합 기능' 약해지며, 갈수록 의례 아닌 휴일로 인식
#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김수민(28ㆍ여)씨는 설을 앞두고 고향인 경남 남해로 내려가는 기차표 대신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티켓을 구매했다. 차표를 사려면 한 달 전부터 ‘예매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표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 일찌감치 포기했다. ‘나 홀로 명절 나기’가 외로울 법도 했지만 김씨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집에 가봐야 친척들로부터 ‘언제 결혼하느냐’는 잔소리에 편히 쉬지도 못한다”며 “평소 보고 싶었던 공연을 보면서 설을 보내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 최은지(30ㆍ여)씨 부부가 이번 설에 떡국을 먹으며 새해 소망을 비는 곳은 고향집이 아닌 서울에 있는 호텔 레스토랑이다. 최씨 부부는 이미 지난 주말 부산에 있는 본가를 방문하고, 성묘도 끝냈다. 최씨는 “5년 전부터 호텔에서 쉬면서 설을 보내고 있는데 ‘명절 후유증’ 없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명절 스트레스를 피해 도심에서 문화 생활을 즐기는 ‘자발적 귀향 포기자’들이 늘고 있다. 개인의 삶의 질을 추구하는 풍토가 자리잡으면서 ‘의례(儀禮)’ 역할을 해왔던 명절이 ‘빨간날(휴일)’로 급속히 변하고 있는 것이다.
17일 공연업계에 따르면 설 연휴기간 뮤지컬, 연극 등 공연 대부분은 10~40%의 ‘설 특별 할인’을 하고 있다. 최고 15만원(VIP석 기준)에 달하는 좌석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어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이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로 꼽힌다. 명절을 겨냥해 출시되는 도심 속 호텔숙박 상품들도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에게 매력적이다. 서울의 한 특급호텔 관계자는 “해외여행은 준비 과정 등에서 부담이 커 호텔에서 편안하게 명절을 보내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며 “정상 가격에서 40% 가량 할인된 가격에 숙박 상품이 나와 수요가 많다”고 설명했다.
다만 느긋하게 도심 속 여유 즐기기를 내심 기대했던 귀향 포기족에게도 걱정은 있다. 설이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春節)과 겹치면서 ‘요우커(游客ㆍ중국인 관광객)’들의 도심 점거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이번 연휴기간 지난해보다 약 30% 증가한 12만6,000여명의 중국인 관광객이 우리나라를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학생 유은영(26ㆍ여)씨는 “요우커들은 한적한 도시를 기대하고 서울에 남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경쟁 상대”라고 말했다.
물론 취업 준비 등으로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비자발적 귀향 포기자’들도 여전히 많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서울 신촌에 있는 스터디 카페에서 토익 영어를 공부하고 있는 성모(27)씨는 “취업 준비생 신분이라 눈치가 보여 지난 추석 때도 경남 창원에 있는 본가에 내려가지 못했다”며 “가족들 얼굴을 보고 싶지만 취업 때까지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행정고시를 준비 중인 민모(26)씨도 “설에 공부 모임이 있어 서울에 머물 예정이다. 그래도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 덜 적적할 것 같다”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렇게 달라진 세밑 풍경은 가족 가치관의 변화, 청년실업 등으로 인한 개인주의의 확산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통적으로 명절은 규범과 규제의 속성을 띠면서 가족통합의 역할을 해왔지만, 산업화로 가족 단위가 변하면서 기능이 약화됐다”며 “앞으로도 이 같은 현상은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재진기자 blanc@hk.co.kr
김민정기자 fac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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