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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추억이 만드는 기억

입력
2015.02.1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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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에 다중인격을 주제로 한 내용이 자주 나온다. 의학적으로는 해리성 인격장애라고 알려져 있는데, 한 사람에게 여러 인격이 나타나는 상태이다. 드라마에서는 7개의 인격을 가진 주인공도 있고, 차가운 모습과 다정한 모습을 상반되게 보여주는 주인공도 있다. 주인공들이 왜 이런 모습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는지 원인을 파헤치고, 결국은 극복해서 온전하게 행복한 한 사람이 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사실 해리성 인격장애는 매우 드물지만, 진료실에서는 다양한 해리증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분리된 자아는 대체로 트라우마, 마음의 상처들, 돌봄을 받지 못한 과거의 기억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트라우마와 공포를 경험하면 자신을 분리해서 일종의 보호막을 만들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분리된 모습이 지속되니 문제가 생기고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극단적인 트라우마를 비롯해서 누적되는 다양한 상처들이 영향을 준다.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 상담하다 보면 큰 트라우마가 아니더라도 작은 상처와 오해들이 쌓여 나중에는 건너기 어려운 강을 만들기도 한다.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아이들의 기억 속 부모님은 상처 주는 모습일 때도 많아 안타깝기도 하다.

아이와 부모님이 같은 상황인데 너무나 다른 기억과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매일 야근하고 집에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가 있다. 회사 일은 많고 실적에 대한 압박으로 집에서는 항상 녹초가 된다. 그래도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마음에 주말에는 아들을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캠핑을 떠난다고 한다. 자연에서 같이 즐기는 시간이 분명히 아들에게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말도 잘 하지 않는 아들에게 야속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이렇게 자식을 위해 애쓰는데 몰라준다고 억울하다고도 했다. 아버지와 대화를 피하는 아들은 같은 순간을 다르게 이야기 한다. 평소에는 말 한마디도 없고 관심도 없고 몇 학년인지 심지어는 학교 이름도 모르는 것 같은 아버지가 일요일에는 아빠 위주로 캠핑을 억지로 끌고 간다고 한다. 아이는 주말에 늦잠도 자고 TV도 보고, 친구들과 자전거도 타러 가고 싶은데 새벽부터 짐을 싸서 억지로 가야 하니 너무 속상하다고 했다. 자신이 힘이 없어 그냥 참고 따라갈 뿐이라고 한다. 텐트치고 음식 만드는 것도 힘든데, 정리도 못하고 게으르다고 한없이 잔소리를 듣다가 온다고 한다. 그러니 주말이 싫고 아버지와는 어색해서 같이 있기가 괴롭다고 한다. 차라리 몸이 아팠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다니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아들을 위해 시간을 내는 아버지와 그런 시간이 못내 불만스러운 아들은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엇나가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무엇을 원하는지 간단히 물어보면 해결되는 경우도 많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지금 하는 것이 좋은지, 많은 경우 좋은 의도라도 상대방의 생각을 모르면 오해가 쌓인다.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냥 평소에 화난 표정 대신 부드럽게 이야기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는 것 등 단순한 것들이었다. 거창하게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는 것보다 나쁜 기억을 적게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나쁜 기억은 각인이 되면 오래 남은 법이다. 그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미 사이가 멀어져 있다면, 한 번에 모든 오해를 풀고 좋은 관계로 돌아가려는 급한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관계의 재구성은 언제라도 늦지 않지만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느리더라고 내 마음도 잘 보듬으면서 다시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주고 싶으면 오늘 당장 다정한 눈빛으로 아이에게 물어보라. 추억은 작은 곳에서 시작된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작고 평범한 추억, 말 한마디가 쌓여 상처를 서서히 지우게 된다. 어린 시절, 과거의 경험은 성장과 발달에 큰 영향을 주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기회는 항상 있다. 설 연휴부터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추억이 쌓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박은진 인제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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