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중하위직 출신 생계 수단이던 행정사 취득에 장관급까지 관심
"진로 막힌 전관 불가피한 선택" "새로운 형태 로비스트" 시각 엇갈려
금융위원회 출신 전직 A 과장과 B 국장은 지난달 서울 광화문의 한 빌딩에 컨설팅 사무실을 열었다. 수년 전 퇴직해 대형 로펌에서 일하던 A 과장이 ‘행정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지난해 퇴직한 B 국장과 의기투합해 금융권을 상대로 한 일종의 ‘신개념 로펌’을 개업한 것이다.
이들의 주요 업무는 일반인이나 기업들의 ‘정부 관련 업무’ 대행 서비스. 최근까지 하나ㆍ외환은행 통합과 관련한 당국 승인을 추진하던 하나금융의 대리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오랜 행정 경험과 부처 내 인맥을 앞세운 ‘로비력’이 이들의 강점이다. 전ㆍ현직 동료들은 “국ㆍ과장급 퇴직 간부가 자체 사무실을 통해 공개적으로 대관 영업에 나선 건 처음 있는 일”이라고 전했다.
이른바 ‘관피아’ 논란에 퇴직 후 갈 곳이 막힌 전직 고위관료들 사이에 새로운 생계수단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컨설팅 사무실처럼 전직 고위 공무원이 민간과 정부부처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예전엔 볼 수 없던 현상이다. 앞으론 이런 형태의 ‘창업’이 더욱 확산될 거란 전망이 지배적인 가운데, 이런 움직임을 바라보는 시선도 엇갈리고 있다.
예전엔 로펌 등에 속해 드러나지 않게 대관 업무를 했던 전직 고위관료들이 직접 영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갈수록 로펌 행조차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이 자체 대관 업무에 나서기 위해 필요한 자격증(일반행정사)에 대한 관심도 동시에 급증하는 분위기다. 행정기관에 제출하는 서류를 작성ㆍ제출하거나 각종 자문, 인허가 업무 대리 등을 맡는 일반행정사는 1960년대부터 행정서사 등으로 불리며 있어 왔지만 그 동안은 주로 중하위직 출신 공무원들의 생계형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2013년부터 일반인에게도 시험을 통한 자격증 획득 문호가 개방됐지만 여전히 현행 행정사 제도는 6급 이상 공무원으로 5년 이상 재직하면 시험을 면제하고 있다.
때문에 최근엔 심지어 전직 장관급 인사들까지 행정사 자격증에 관심을 보일 정도다. 혹시 모를 미래의 생계수단을 위해 더 늦기 전에 자격을 따 두자는 전직 관료들 사이의 권유도 활발하다. 한 전직 차관급 인사는 “주변에서 올 여름 선발 때에 맞춰 행정사 자격증을 받아 두겠다는 선후배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런 움직임을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우선 전현직 관료들 사이에선 퇴직 후 생계가 막힌 전관들의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의견이 많다. 과거 몸담았던 조직이 퇴직 후 생계를 더 이상 책임져주지 않는 현실에서 홀로서기를 위해서라도 과거의 경험을 합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반면, “새로운 형태의 고급 로비스트”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행정부처가 쥔 방대한 인ㆍ허가권에 여전히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은 만큼 전직 고위관료들이 인맥을 이용해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설 경우 또 다른 전관예우 논란이 일 것이라는 비판이다. 지난해 시험을 통해 자격을 딴 일반인 행정사들이 현행 무시험 자격 부여 제도에 대해 헌법소원까지 제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윤석헌 숭실대 교수는 “합법적인 로비스트 제도가 없음에도 우리 사회엔 분명 대관 로비 수요가 존재한다”며 “강도 높은 관피아 취업 제한의 부작용도 제기되는 만큼 당분간은 전관들의 새로운 시도가 어떻게 자리잡을 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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