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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나기

입력
2015.02.1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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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 기온 29도. 밤 기온은 13도.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하고, 낮에는 살짝 더운 날들이 몇 주째 이어지고 있다. 나는 지금 태국 북부의 도시 치앙마이에 머물고 있다. 서울의 거리에 꽃이 피어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다며 단기임대 숙소를 구했다. 추위를 심하게 타는 내가 ‘피한’을 나오기 시작한 건 올해가 두 번째다. 지난해 겨울은 인도네시아의 섬 발리에서 보냈고, 올해는 치앙마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처럼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을 나는 한국인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돈이 많으니 저렇게 살 수 있는 거라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며칠 전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부산 언니 S. 그녀의 방세는 한 달에 11만원. 방세와 생활비를 더해 한 달에 40만원 남짓한 돈으로 육 개월째 머물고 있다. 물론 그의 방에는 부엌이 없고 냉장고만 있어 매끼 밖에서 해결해야 한다.

내 경우는 그보다 훨씬 사치스럽다. 방세 35만원을 포함한 한 달 생활비가 70만원. 수영장이 딸린 콘도인 데다, 원룸이지만 부엌시설이 갖춰진 집을 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하루 한두 끼는 집에서 간단히 해먹는다. 혼자 두세 달씩 이곳에 머무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그와 나의 생활비 규모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돈으로는 서울에서 살기 힘들다. 아무리 아껴도 이곳의 두 배 이상은 든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는 도시가 강제하는 소비의 규모가 있기 때문이다. 만날 사람들이 있고, 최소한의 문화생활이 있고, 무엇보다 기본적인 물가도 비싸다. 게다가 겨울이 오면 난방비까지 감당해야 한다. 산 밑의 다세대주택인 우리집은 보일러 온도를 19도에 맞춰놓고 잠깐씩만 돌려도 월 20만원의 가스비가 나온다. 집 안에서 긴 팔 옷을 두 세 개씩 껴입고 사는 건 기본이다. ‘이게 지구에도 좋고, 내 건강에도 좋아’라며 자족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추위에 절절 매는 날들이 힘겹다.

그래서 지난해부터는 난방비 걱정 없고, 물가도 저렴한 나라를 찾아오게 되었다. 생활비를 절약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소박하고 단순한 일상이다. 옷장을 열면 티셔츠와 바지 포함해서 열 벌 남짓이 전부다. 입지 않는 옷을 쌓아두는 일은 없다. 책상 위의 책도 열 권 남짓. 아껴가며 한 권 한 권 소중히 읽어나간다. 부엌 살림은 냄비 하나, 프라이팬 하나, 몇 개의 접시와 컵 두세 개가 전부다. 밥솥조차 없다. 그러니 간단하게 요리할 수밖에. 집이 작으니 청소에도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인간관계도 제한적이니 내키지 않는 모임에 불려나갈 일도 없다.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절로 생겨난다. 온전히 시간을 누리고, 가진 것들을 충실이 사용하는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이렇게 적은 것들로 일상을 꾸려갈 수 있다니, 평소에 필요 없는 물건을 얼마나 많이 쌓아두고 사는 건가 새삼 반성도 하게 된다. 앞에서 말한 부산 언니의 경우는 나보다 더 일상이 간결해 보인다. 그의 하루는 명상과 요가로 채워지고 있는 것 같으니.

또 치앙마이는 사람들의 성정이 순박하고 온화하기로 유명하다. 며칠 전, 그릇 가게에서 구경을 하다 찻잔을 깨뜨렸다. 깨진 찻잔 값을 지불하려는 내게 주인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가게에서 구경만 실컷 하고 나와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기도하듯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으는 태국식 인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주고받게 된다. 태국의 경제가 발전하는 만큼 치앙마이 또한 옛 모습을 잃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 사람들은 잘 웃고, 친절하고, 느긋하다(이를 악물고 버둥거리지 않아도 대충 생활이 꾸려지는 열대의 기후환경도 이들의 성격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물론 타국 생활이라 불편함도 따라온다. 언어와 풍습이 다르니 좌충우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프기라도 하면 낭패다. 하지만 약간의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한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곳은 없으니. 그저 다른 문화를 배운다는 자세로, 삶의 속도를 한 박자 늦춘다는 마음으로 지내보는 거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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