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교실 수료 할머니 6명에
사울마장초 명예 졸업장 수여
“평생의 한을 풀었어요.” 초등학교 문턱 한 번 밟아보지 못한 한점복(79) 할머니는 남들보다 60여년 늦은 졸업장을 받아 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한글을 모르니 혼자서 길을 나설 때마다 표지판을 읽지 못해 항상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젠 어디라도 자신 있게 다닌다”고 말했다.
13일 오전 서울 성동구 마장초등학교 강당. 초등학교 졸업생 146명과 함께 할머니 5명이 노란 술을 단 학사모에 남색 가운을 입고 들어섰다. 마장초가 인근 시립성동노인종합복지관에서 운영하는 한글교실 교육과정 수료생 6명에게 초등학교 명예 졸업장을 주기로 결정한 것. 매주 화, 목요일 한 시간씩 복지관 수업을 들으며 3~6년간 공부해 3단계까지 시험을 모두 통과한 학구파 할머니들이다. 이날 졸업식에는 “손자와 같은 학교에서 졸업하는 게 부끄럽다”는 할머니 한 명만 불참했다.
졸업식 최고령자인 한점복 할머니는 1940년대 일제의 식량 공출사업 때문에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으로 내몰렸다. 한 할머니는 “농사를 짓고 직물을 짜면서도 책보따리를 메고 학교 가던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한 할머니는 “자식 다섯 명을 다 키워내고 더 늦기 전에 손자, 손녀들에게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선물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고 한글공부를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유 없는 통증으로 발 수술을 받았던 3년 전 겨울에도 슬리퍼를 신고 기어코 복지관에 나갔을 만큼 학구열은 뜨거웠다.
불행한 시대를 겪느라 공부를 포기한 건 한 할머니뿐이 아니다. 정정자(73) 할머니는 6ㆍ25전쟁 때 부모님을 잃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피란 길에서 어머니는 북한군 폭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행방불명 됐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정 할머니는 전라도에 있는 외갓집에 들어갔지만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2학년 이후 공부를 중단해야 했다. “한글공부가 평생 숙제처럼 여겨졌다”는 정 할머니는 친구의 권유로 3년 전 한글교실에 들어갔다. 정 할머니는 “오늘로 초등학교를 60년 만에 졸업한 셈이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자랑하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명예 졸업생들은 한글을 깨우치면서 자신감이 부쩍 커졌다고 입을 모았다. 이은순(78) 할머니는 “일어, 영어 공부에도 도전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서금순(73) 할머니는 “이제 혼자서도 은행이나 동사무소에서 일을 볼 수 있게 됐다”며 “카카오톡 문자메시지 보내는 것도 배워볼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복지관은 할머니들이 지난 3년간 한글을 공부하면서 썼던 편지와 일기를 모아 ‘나의 소망 여기에’라는 소장용 책자도 만들었다. 16년 전 세상을 뜬 남편에게 그립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쓴 한점복 할머니의 편지가 책 첫 장에 실렸다.
김민정기자 fac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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