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차원 넘어선 뇌물수수ㆍ정신질환
정상적 다수 법관들도 함께 신뢰 위기
대법원의 옥석 가리기 더욱 엄격해야
언론이 조심스럽게 다루는 대상 중 하나가 법관이다. 법관에 대한 국민들의 일반적인 신뢰가 두텁고, 판결 이상의 판단을 구할 제도적 장치가 어렵기 때문이다. 판결의 잘잘못이나 판사의 비리 의혹이 오랫동안 보도의 금기(禁忌)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새해 들어 판사들의 기사가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이른바 ‘명동 사채 왕’에게서 수억 원의 검은 돈을 받은 A판사가 구속됐다. 지난해 4월 한국일보가 현직 판사의 뇌물수수 의혹을 특종 보도한지 10개월 만이다. A판사의 비리 의혹 보도는 다른 언론과 여론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다. 한국일보는 관계자들의 새로운 진술과 정황증거 등을 연이어 보도했고, 지난달 17일 검찰은 A판사를 비밀리에 조사했다. 혐의를 부인하던 A판사는 이튿날 새벽 검찰에 자진출두 의사를 밝혔고, 곧바로 긴급체포 됐다.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그 다음날(20일) 구속됐다. 현직 판사의 비리가 이렇게라도 매듭지어진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엊그제 ‘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을 갖게 했던 B판사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보도됐다. 한국일보 사회면 톱기사(11일자 11면)로 소개됐다. 깡통주택이어서 전세보증금 2,500만원을 떼이게 돼 상심했던 여인은 B판사로부터 “그 돈을 법원에서 받아가라”는 판결을 받았다. 지체장애인 남편은 지난해 7월 거주하건 아파트의 전세보증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이를 비관해 분신 자살했다. 전후 사정을 짐작했던 B판사는 피고측이 깡통주택 사기사건에 말려들었음을 알게 됐고, 적법을 빙자한 이러한 사건을 근절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B판사는 동료들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적법을 빙자한 사기’의 구조적 문제점을 확인했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업자와 브로커, 법무사와 공인중개사 등 60여명이 사법처리를 받게 됐다. 판사가 검사에게 관련 사건의 수사를 의뢰해 다시 바로잡은 일은 거의 보지 못했다. B판사는 “(법조문대로)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판사가 그러면 안되지만 딱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가슴 찡한 감동을 느꼈다.
이어 C판사 사건이 터졌다. 정신 나간 댓글 판사다. 현직 판사가 숨어서 익명으로, 중고등학생조차 부끄러워해야 할 수준의 글들을 수년간 수천 건 인터넷 상에 올렸다. 성인으로서의 양식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어떤 고위직 검찰이 심야에 혼자 저질렀던 공연음란행위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와 마찬가지로 C판사도 일종의 정신질환자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은 C판사에 대해 징계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대법원은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A판사에 정직 1년이라는 ‘해방 이후 최대의 징계’를 내렸다고 평가했다. 법관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기준에 따르면 B판사의 사례는 당연하거나 당연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A판사와 C판사의 기사는 대서특필 되는 것이며, B판사의 사례는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주목 받지 못하고 넘어갔다.
옥석구분(玉石俱焚)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서경(書經) 하서(夏書) 윤정편(胤征篇)에 나오는 말인데 “산에 불이 붙으면 옥과 돌이 다 함께 불에 타버린다”는 뜻이다. 못된 괴수를 정벌하러 가는 하(夏)나라 장수 윤후(胤侯)가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의 의미로 했다는 말이다. 수천 년이 흐르면서 ‘함께 불에 탄다’는 구분(俱焚)이 ‘잘 가려야 한다’는 구분(區分)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결국 그게 그것인 셈이다.
새해 들어 불과 한 달여 만에 판사들 얘기가 연이어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갖는 법관의 의미에 따르면 ‘이런 판사도 있고 저런 판사도 있다’는 정도로 넘겨버릴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대법원은 고작 법관윤리강령이라는 글귀만 들먹이고 있다. 구속된 A판사에 대한 “1년 정직”의 의미가 무엇이며, C판사에 대해 “징계를 검토 중”이란 수사는 또 무엇인지 궁금하다. B판사와 동료들의 신뢰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대법원은 옥석을 엄정히 가려야 한다. 수천 년 전 이미 옥석이 함께 불타는 현실을 경계했다. 오늘 우리의 대법원이 중국 하은주(夏殷周)시대 일개 장수의 생각에도 미치지 못해선 안 된다.
논설고문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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