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등과(五子登科)’.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별전(오늘날의 기념화폐)이나 자수품 등에 흔히 새겨져 있는 글귀다.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이 글귀에는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소망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유물에는 이 외에도 ‘오자출신(五子出身)’ ‘오자장원(五子壯元)’등 과거급제와 관련된 글귀가 빈번히 등장한다. 과거제가 당시 사대부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조선시대 유물을 집중 조명한 책이 나왔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펴낸 ‘사물로 본 조선’은 집과 건물, 책, 농업과 수차(水車), 전쟁 무기, 의복 등 조선시대 일상적으로 사용됐던 사물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살펴본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규장각 교양총서’ 11번째 책이다.
책은 서두에서 “조선의 문화가 담긴 그릇”으로서 당시의 주택양식을 집중 조명한다. 오늘날 사적인 공간으로 분류되는 것과 달리 조선시대의 주택은 마을 전체가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농경과 집성(集姓)이라는 공동체적 특성을 잘 나타내주는 문화적 유산이다. 조선시대 서민층의 주 생계수단인 벼농사는 이웃간의 협력을 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같은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관계가 효율적이었다. 농번기에 공동으로 참과 끼니를 해결하고, 농한기에 친척끼리 모여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가마솥과 부엌이 커지고 방이 늘었다. 이 때문에 사대부가 아닌 피지배계층의 집마저도 대부분 7칸 내외의 큰 규모로 지어졌다. 여기에 마루, 화장실 등 독립된 건물들까지 한 지붕 아래 소화해야 했다. 결국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각각의 건물이 안마당을 둘러싼 ㄱ자, ㄷ자 등의 주택양식이 정착됐다. 민속박물관이나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주택에는 이 같은 과거 생활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사대부의 복식과 장신구에 깃든 이야기도 흥미롭다. 특히 선비의 상징인 갓은 유행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갓 모양은 조선 초기에 성행했던 것일 뿐, 실제 사대부들은 중기 이후 이엄(耳掩ㆍ비단과 모피로 만든 방한모의 일종)을 갓처럼 쓰거나 호박, 금패 등 보석으로 갓끈을 꾸미는 등 갓을 과시품으로 여겼다. 이를 보다 못한 조정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갓의 형태를 통일하려 했다. 연산군은 갓의 표본을 제작한 후 갓쟁이에게 그 모양 그대로 갓을 만들 것을 하명했고, 성종은 승립(승려의 갓)과 닮은 갓을 쓰지 말 것을 사대부들에게 당부했다. 명종은 한 발 더 나아가 챙이 좁아지고 모정이 높은 새로운 갓을 제작해 시중에 유통시켰지만 사대부들은 명종의 갓이 균형이 맞지 않는다며 비웃었다. 갓에 대한 기록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중심축을 이뤘던 사대부와 그들을 통제하고 견제하려 했던 왕권 사이의 신경전의 역사다.
책은 이 밖에도 농업개혁과 수차 도입, 토색질(감옥에서 고참 죄수들이 신참 죄수에게 가한 가혹행위), 전통 악기에 깃든 이야기 등을 다양한 자료와 함께 알기 쉽게 소개한다. 풍성한 소재를 통해 조선시대 생활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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