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코미디 배우 찰리 채플린(1889~1977)이 남긴 유일한 소설 ‘풋라이트’가 60여년 만에 출간됐다. 채플린이 매카시즘 광풍에 휘말려 미국에서 쫓겨나기 전 찍은 마지막 영화 ‘라임라이트’(1952)의 뿌리 역할을 한 작품이다. 1948년 쓰였지만 채플린이 출간할 뜻을 비치지 않아 66년간 서랍 속에 잠들어 있다가 뒤늦게 빛을 보게 됐다. 무성영화를 보급?복원하는 영화 아카이브 단체 시네테카 디 볼로냐가 이탈리아에서 지난해 처음 출간했고 번역서로는 한국이 처음이다.
‘풋라이트’는 스스로 목숨을 끓으려던 젊은 발레리나 테리와 그를 구해준 늙은 희극 배우 칼베로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그린다. 골격은 소설과 영화가 대동소이하다. 대사도 크게 바뀌지 않고 영화에 이식됐다. 가장 큰 차이는 테리가 왕년의 스타 칼베로를 만나기 전까지 이야기다. 소설의 6분의 1에 달하는 이 내용이 영화에선 플래시백으로 짤막하게 축약됐다. 관객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칼베로의 복잡한 심리와 예술을 향한 그의 갈망과 절망 역시 소설이 좀 더 자세하다.
평생을 채플린 연구에 몰두해온 영화평론가 데이비드 로빈슨이 소설을 복원하고 해설을 덧붙였다. 채플린이 쓴 170여쪽의 글보다 로빈슨이 꼼꼼하게 정리한 해설과 방대한 관련 자료의 분량이 더 많다. ‘풋라이트’가 어떻게 쓰였고, 누가 극중 인물의 모델이 됐는지, ‘라임라이트’ 제작 과정에서 채플린에게 기쁨과 고통을 줬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상세히 알려준다. ‘풋라이트’ 외에 주인공 칼베로를 설명하는 짤막한 글 ‘칼베로 이야기’도 실렸다.
로빈슨은 시종일관 비평가가 아닌 역사가의 입장을 고수했다. ‘라임라이트’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채플린과 무용수 바츨라프 니진스키의 첫 만남(1916년 즈음)을 비롯해 ‘풋라이트’ ‘라임라이트’와 관련한 단서들을 그러모았다. 소설이 시나리오로 시나브로 바뀌고 캐스팅과 촬영, 편집을 거쳐 영화로 완성되기까지 4년의 과정이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펼쳐진다. 영화의 배경이 된 20세기 초의 런던, 칼베로의 무대이자 채플린 부모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뮤직홀, 작품에 투영된 채플린 가족의 초상 등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채플린 전문가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라임라이트’는 채플린의 자전적 영화다. 런던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과 내밀한 상처들, 예술가의 번뇌 등이 응집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은 예술가 채플린의 내면을 탐사한 보고서인 셈이다. 그런 이유로 ‘풋라이트’에서 칼베로의 대사는 종종 채플린의 고백처럼 읽힌다. 그 중 하나. “사람은 다 아마추어 아니겠습니까. 그 누구도 아마추어를 뛰어넘는 존재가 될 정도로 오래 살지는 못해요.”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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