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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곧은 인재가 성장하는 사회

입력
2015.02.1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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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직접 지도자를 선출하지 않았던 고대에도 민심은 중요했다. 그래서 많은 국왕들이 민심획득 방안을 고민했다. 노(魯)나라 애공(哀公ㆍ재위 기원전 494~468년)도 마찬가지였다.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애공은 공자(孔子)에게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복종합니까’라고 묻는다. 공자는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굽은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들이 복종하고 굽은 사람을 등용하고 곧은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곧은 사람을 쓰면 백성들이 복종한다는 간단한 논리다. 그러나 이 간단한 논리를 실천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곧은 사람은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반면 굽은 사람은 입 속의 혀처럼 비위를 맞추기 때문이다. 게다가 곧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소인배들의 참소를 받게 되어 있다.

공자가 성인으로 높인 주공(周公)도 마찬가지였다. 주공은 주 왕조를 세운 주 문왕(文王)의 아들이자 중원을 통일한 무왕(武王)의 동생이었다. 무왕 사후 왕위에 오른 조카 성왕(成王)은 열세 살에 불과했기에 주공이 대신 섭정했다. 이때 주공의 정사에 대한 사자성어가 토포악발(吐哺握髮)이다.

식사 때 손님이 찾아오면 먹던 밥을 뱉고(吐哺), 목욕할 때 손님이 찾아오면 머리를 움켜쥐고(握髮) 나가서 맞이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생 관숙(管叔) 등은 주공이 성왕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유언을 퍼뜨렸다. 상심한 주공은 “내가 회피하지 않으면 선왕들에게 아뢸 말이 없게 될 것이다”라면서 섭정 자리를 내놓고 동도(東都)로 물러나 은둔했다. 은둔 2년째 가을 풍년이 들었는데 수확하기 전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큰 바람이 몰아쳐 벼가 쓰러지고 나무들이 뽑혀 나갔다.

하늘의 견책으로 우려한 성왕이 대부(大夫)들과 함께 쇠줄로 묶인 금등(金?)의 글을 열어보았다. 이를 금등지사(金?之詞)라고 하는데 무왕이 아플 때 주공이 제단을 마련해 놓고 태왕(太王) 왕계(王季) 문왕(文王) 같은 선왕들에게 무왕보다 신령을 잘 모실 수 있는 자신을 대신 데려가고 무왕에게는 건강을 달라고 빈 글이었다.

이에 주공이 무고 당했음을 깨달은 성왕이 주공을 맞이하러 교외까지 나가니 하늘이 비를 내리고 바람이 반대쪽으로 불게 해서 쓰러졌던 벼가 다시 일어났고, 사람들에게 쓰러진 나무를 일으켜 세우게 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 해 큰 풍년이 들었다는 것인데 ‘서경’의 주서(周書) 금등(金?)편에 나온다. 하늘이 그만큼 사심 없는 인재를 위하고 이런 인재를 등용하는 사회에 복을 내린다는 뜻이다.

생육신 남효온(南孝溫)이 쓴 사육신 전기인 ‘육신전(六臣傳)’에도 주공 이야기가 나온다. 상왕 단종 복위기도 사건이 발각된 후 세조의 직접 국문을 받던 성삼문(成三問)은 “나으리(進賜)는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을 끌어서 증거 댔는데, 주공도 또한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었소”라고 힐난하면서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는 해가 둘 일 수 없고, 백성에게는 임금이 둘 일 수 없기 때문이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세조, 즉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년) 10월 김종서·황보인 등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대거 살육한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단종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란 소문이 돌자 주공을 자처해 왕위에 뜻이 없는 것처럼 행세하다가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해서 사육신은 물론 남효온, 김시습 같은 생육신들이 정사 참여를 거부한 것은 그만큼 국가에 손실이었다. 왕위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출사를 거부한 사람들이야말로 곧은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임금을 뽑지 않던 왕조 시절에도 민심을 중시한 이유는 의병장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말해준다. 최익현은 망국 일보직전인 광무 8년(1904년) 임금에게 “민심은 바로 천심입니다. 민심이 이렇게 흩어져 있으니 천심도 이를 따라 알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늘은 민심에 따라서 왕을 세우거나 폐하기 때문에 민심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성인(聖人)은 일정한 마음이 없고 백성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는 것’을 내가 평생토록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래서 벽에 새로 도배를 하면 이 말을 써서 좌우명(座右銘)으로 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사청문회마다 참사가 거듭되면서 집권 여당은 물론 우리 사회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인사권자가 곧은 인재는 버려두고 굽은 사람만 거듭 발탁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겠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굽은 인재만이 성공할 수 있는 구조적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내부고발자라고 불렸던 공익신고자가 각종 불이익을 받는 상황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기존 가치나 카르텔에 의문을 제기하면 여기저기에서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사회에서 곧은 인재가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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