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기인으로 유명한 정수동은 술을 워낙 좋아하여 과음으로 돌아갔다. 정수동의 부인이 홀로 되어 고생할 적에 정수동을 아끼던 대감 한 분이 한 겨울에 쌀과 나무를 보내자 “그 댁 대감께서 내게 쌀과 땔감을 보내실 일이 없다”고 받지 않았다. 실수를 깨달은 대감이 마님이 보냈다고 하며 다시 보내니, 그제야 수동의 아내는 그 쌀과 나무를 받았다고 한다.
근대의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이태준은 ‘묵죽과 신부’에서 이 일화를 예로 들며 “떨고 굶주리되 사량(思量ㆍ생각하여 헤아림)과 체도(體度ㆍ체모와 태도)를 헐지 않는 여유, 이거야말로 높은 교양이요 예의요 자존심일 것이다”라고 해설을 붙였다. 이태준은 대나무를 직접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대나무와 같은 꼿꼿하고 곧은 기상을 이렇게 높이 기렸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해도 정신과 법도를 높이 여기던 시절은 그리 옛날이 아니었다.
청계천변 달동네 유일의 대학 졸업자 그것도 법대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동네 무료 법률상담소장 노릇을 하셨다. 안방에는 아버지가 창호지 문을 닫고 앉아 계셨고 어머니는 마루에 그리고 의뢰인인 동네 아주머니는 마당 또는 문가에서 어머니께 묻고 싶은 내용을 전하였다. 아주머니가 어머니께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하시면 어머니는 들으신 대로 아버지께 전달하는 방식이었는데 대답은 물론 그 역순이었다.
어린 나는 이러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전달체계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주머니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감자나 채소 바구니 등을 들고 집에 오면 또 그 일이구나 하며 골목으로 축방으로 달려 나가곤 했다. 육성회비를 제때 못 내는 애들이 워낙 많았기에 담임 선생님의 닦달은 그러려니 넘어갔고 도시락 반찬이 언제나 고추장이나 김치 하나라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땐 모두 그렇게 살았기에 가난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한다는 사실이 용납되긴 어려운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TV 드라마에서는 “그래도 우리가 사대부 집안이었는데! 어떻게 저런 장돌뱅이에게…”라는 표현이 나오곤 했음을 기억한다. 요즘처럼 재벌가가 명문가로 인식되는 시절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언젠가 미식가 선생님을 모시고 약주 한 잔 나눌 적에 들은 말씀이다. “우리 때는 돈 있는 걸 숨겼지” 하시며 당신 사모님이 부잣집 딸로 약사인데 그걸 결혼할 때 말하지 않았고 주변에서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고 하셨다. 결혼은 당사자끼리 하는 것이고 그 집안의 일이니 부자건 학벌이건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IMF 사태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TV광고에서 미모의 여성 탤런트가 화사하게 웃으며 “여러 분 부자 되세요!” 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보는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하는 충격적 화면이었기에 뇌리에 쏙쏙 들어와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성공작이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체면, 교양 등이 아니고 오로지 돈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최인훈은 “신분과 복색이 일치된 황금시대여”라는 구절로 전통시대를 회상한 바 있다. 이 말에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자신의 지위나 신분에 걸 맞는 사고의 수준을 갖거나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이슬람국가(IS)가 점령한 위험지역에 갔다가 참수 당한 일본인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의 어머니가 외국인 기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아들로 인해 심려를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부터 먼저 했다. 그런 다음 아들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일부에서는 ‘내 슬픔보다 예의가 먼저’ 등 이해하기 힘든 일본인의 행태라고 비하하기도 했지만 국가와 주변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읽혀진다고 생각하면 과한 해석은 아닐 듯싶다.
우리는 어떤가. 감정의 원초적 폭발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을 쉽사리 목격할 수 있지 않은가. 문명의 수준은 인간의 욕심, 욕망 등 원초적 감정을 얼마나 세련되게 가리는가에 따라 그 높고 낮음이 갈린다는 생각이다. 그나마 조금씩이나마 나아져 가는 듯한 흐름에 희망을 걸어야겠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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