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방어 기제 ‘억압’ ‘해리’
흥미를 위한 극중 단골 재료로 등장
단순한 만화적 설정에서 벗어나야
정신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주로 다루게 되는 심리적 방어 기제는 ‘억압’이다. 억압이란,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면 너무나 괴롭기 때문에 이를 기억하지 않고 무의식에 넣어 두는 것을 이른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은 비록 무의식에 존재하고 떠올릴 수는 없지만 나의 기억 체계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으며 어쩌면 그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생각이요 이에 동반된 감정이다. 그래서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 그 순간마다 나의 결정과 판단 그리고 행동을 지배한다. 프로이트는 ‘안나 오’의 사례를 통해 “최면을 통하여 환자가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된 가슴 아픈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신체의 마비가 풀리고 증상이 호전”되는 사실을 보고했다. 결국 정신치료란 감당하기 어려운 과거의 기억이지만 나에게 큰 영향을 지금도 미치고 있는 기억들을, 치료자의 도움을 받아 무의식에서 끄집어내어 자신이 스스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억압된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이다.
그런데 너무나 큰 정신적 외상이나 성적 학대를 받은 사람들은 그 당시의 기억을 무의식에서 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 체계와 완전히 분리하여 ‘해리’시키기도 한다. 즉 자신의 전체 마음과 동 떨어진 다른 마음이 한 사람 안에 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사람이 평소에 잘 지내다가 우연히 들은 헬리콥터 소리에 마치 지금 여기가 전쟁터인 양 행동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환자들이 좋은 예다. 해리된 기억과 그 당시 감정이 작동하면서 마치 딴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아동기에 반복된 심각한 정신적 외상이나 성적 학대는 해리된 기억들이 다른 하나의 기억 체계를 이루고 그것이 다른 인격을 구성하도록 할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을 ‘다중인격장애’라고 한다. 한 사람 안에 다른 독립된 정체성을 가진 다른 인격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지는 모르나 다중인격장애는 비록 주요 정신병적 질환은 아니더라도 매우 심각한 정신과적 문제이다. 대부분 과거 심각한 마음의 상처가 있으며 현재 대인관계가 어렵고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지 못한다. 억압이건 해리이건 간에 개인의 정신과적 문제는 그에게 단 한 번의 사건과 결부된 나쁜 기억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대인관계에 큰 영향을 주고 현재에도 마음의 고통과 신체적 증상을 만드는 핵심적이면서 심각한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각종 정신 질환을 앓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백마 탄 왕자에 신데렐라나 캔디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여기에 재벌2세, 출생의 비밀 그리고 불륜을 적당히 버무려 계속 반복 재생산하고 변주한다. 재벌2세 왕자님들이 너무나 완벽하면 현실감이 떨어지므로 뭔가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주어야겠고 이젠 더 이상의 소재가 없다 보니 시청자들에게는 새롭고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다중인격장애라는 정신질환이 주인공을 포장하기 위해 등장하게 된 것 같다. 사회적 낙인과 차별이 아직도 여전한 정신질환이 드라마에 소재로 나오면서 일반 대중들의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을 완화할 수도 있겠으나 정신질환을 다루는 태도가 너무나 피상적이고 그저 드라마를 위한 만화적 설정과 단순한 장치로서만 기능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역시 아직 정신질환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큰 고통이 아니라 신기한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정신질환이 있는 환자들의 과거 고통과 그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화해와 사랑의 과정을 담은 훌륭한 명작 영화들이 있고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도 정신질환을 심도 있게 다루어 큰 호평을 받았다. 물론 시청률에 따라 웃고 우는 드라마의 제작 현실에서 심각하고 진지한 태도로 정신질환을 다루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나라 드라마가 반복된 비현실적 신데렐라 사랑 놀음으로 대중의 시선을 끌 수 있을까? 세상은 딱 들어맞는 논리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고 개인들의 왜곡된 감정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변화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구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질환을 잘 이해하고 다룬다면 좋은 드라마도 탄생하고 좋은 세상도 오리라 확언한다.
기선완 국제성모병원 기획조정실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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