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바람에 눈발까지 날려 눈조차 뜨기 힘든 모양이다. 오렌지 팔러 나온 누이를 혼자 두기 싫었던지 심심했던지 어린 두 동생도 누이 곁에 나와 앉았다. 덮어 쓴 숄을 들춰 길을 살펴보지만 거리는 휑하다. 숄도 금세 젖어 무거워질 것이다.
매일 수천 장씩 쏟아지는 외신 사진들에도 패턴들이 있다. 패턴이 읽히면 전형성이 보이고, 다른 풍경 다른 앵글도 서서히 진부해져 간다. ‘가난의 포르노’도 예외는 아니어서, 끌림도 감흥도 하릴없이 약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사진들이 있다. 반전의 기약 없는 전쟁 난민 풍경이 그렇다. 멎을 듯 잦아들며 아슬아슬 이어지는 심장파동처럼, 근원적 죄의식과 말초적 감상을 함께 자극하는 집요한 통증.
절박한 현실 앞에서 역사는 자주 아늑한 양심의 도피처가 된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서 그랬듯, 저기서 냉전과 동구 붕괴를 말하고 아프간의 군사지정학적 가치와 미국의 근원적 책임론을 독경하듯 읊어대는 것은 위선이다. ‘거대한 정의’에 자주 냉소하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무기력함이, 위선이 짜증스럽기 때문이다. 인류는 나날이 실패하고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이슬라마바드=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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