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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쇄신하고 나를 지탱하는 힘, 그것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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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쇄신하고 나를 지탱하는 힘, 그것이 예술

입력
2015.02.06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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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 선언 문광훈 지음 김영사 발행ㆍ472쪽ㆍ2만5,000원
심미주의 선언 문광훈 지음 김영사 발행ㆍ472쪽ㆍ2만5,000원

예술과 윤리의 대립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제는 영화의 홍보문구로도 쓰이는 ‘외설인가 예술인가’라는 문구부터 일부 예술가들의 추잡한 뒷모습까지. 예술과 윤리는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고 가끔은 반비례할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광훈 충북대 독문학과 교수의 ‘심미주의 선언’은 예술과 윤리의 전쟁터 한가운데서 “예술을 통한 윤리의 실현”을 부르짖는다. 저자는 제대로 살기 위한 방편으로 시와 그림과 음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수준을 넘어서, 영혼의 날카로운 연마제로서의 예술을 설파한다.

“예술의 장르가 어떻고, 그 작품에 대한 접근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예술의 지향은 결국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그 지점이란 삶이다. 그것은 오늘의 삶 ? 오늘을 사는 나와 우리 모두의 삶이다. 예술이, 그것을 감상하는 나와 우리의 지금 삶을 쇄신시키는 데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있을 것인가?”

저자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삶과 분리된 예술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고 찬반 진영은 그 나름의 논리를 발전시키며 현재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저자의 주장이 어느 진영에 속한 것이냐가 아니라, 예술의 생산?소비 과정에서 어떻게 윤리가 발생하는지 혹은 윤리에 대한 열망이 어떻게 예술로 화하는지에 대한 저자 나름의 사유다.

‘지금, 여기, 우리’를 쇄신하기 위한 예술의 힘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푸코, 윤두서, 이태준, 백석, 바를라흐의 삶을 탐색한다.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인 공재 윤두서의 삶은 그의 아들 윤덕희가 남긴 ‘공재공행장’에 낱낱이 기록돼 있다. 그에 따르면 공재는 한겨울에도 홑옷을 입었고, 하루 두 끼 이상 먹는 일이 없었다. 당파 싸움이 극심하던 때였으나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평소에는 조용히 방에 들어 앉아 자수(自修)하며 문상이나 문병 외에는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수련에 가까운 공재의 삶은 당시 조선을 지배했던 유학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사상의 엄중함과 공재의 바위 같은 이성만이 수련을 지속하게 만든 힘은 아니었다. 삶의 쇄신을 가동하는 세 개의 톱니바퀴 중 철학과 이성의 바퀴만으로는 작동이 불가능하다면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까.

저자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예술에 기대어 우리는 새롭게 느끼는 법을 배운다. 이 느낌은 그러나 단지 느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새 느낌은 새 생각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이 느낌/감성 속에 의식/정신이 이미 작용한다. 감각의 문제가 1차적으로는 신경생리학적 사안이면서 동시에, 적어도 어떤 지점에 이르면, 이 신경세포적?대뇌피질적?물리적 차원으로만 환원될 수 없고, 그러는 한 그것은 가장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사안에서도 어떤 지능유사적?의식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예술에서 받은 감흥이 윤리를 성취하는 힘으로 치환되는 과정을, 신체(뇌)와 영혼의 관계로 설명하는 부분은 적잖이 흥미롭다. 마치 연금술처럼 미심쩍은 이 주장은 저자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최근 뇌과학 분야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사안이다. 학계에 따르면 감성과 이성을 물건처럼 둘로 나눠 생각하는 것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말을 저자의 주장으로 가져와 거칠게 대입하면 예술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 자체로 인간은 갱신될 수 있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18세기 초). 얼굴만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 아래 몸을 버드나무 숯으로 간략하게 스케치한 이본도 있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18세기 초). 얼굴만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 아래 몸을 버드나무 숯으로 간략하게 스케치한 이본도 있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자. 호랑이처럼 사방으로 뻗친 수염과 굳게 다문 입, 치켜 올라간 눈썹 등 그의 성격을 가늠케 하는 단서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부릅뜬 눈이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 눈은 이전투구로 혼탁해진 조정과 일찍 사별한 아내, 형제들의 몰락 등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흐려지기는커녕 더욱 형형하게 빛을 낸다. 저자는 이 눈빛에서 삶에 대한 윤두서의 응전 방식을 읽는다. 그림 속 흐트러짐 없는 눈매는,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수련하며 다시 수련된 자신으로 세상과 맞닥뜨렸던 삶의 원동력이자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삶의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이 예술을 통해 고취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역으로 예술을 향해 외치는 정언명령이기도 하다. 저자는 비예술의 시대 속에서 애써 간절한 심정을 감추며 단언한다. “영혼의 밀도를 더 하고…진실의 지평을 넓히며…삶을 쇄신시키는 데” 실패한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고.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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