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요즘 영화 한 편 때문에 다수의 보수와 소수의 진보가 멱살 잡고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서 저격수로 활약한 전쟁 영웅 크리스 카일을 그린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인데, 개인적으로 올해 본 것 중 가장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빼어난 연출력에 감탄하면서도 떫은 뒷맛을 지우려 애써 마른 침만 삼켰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처럼 훌륭한 전쟁영화를 찍었던 그가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게 드러난 이라크 침공에 대해선 왜 아무런 성찰도 하지 않은 걸까.
물론 전쟁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주인공이 전쟁 후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가족의 고통을 보여주는 부분이 대표적인데, 카일의 침묵 속에 숨어버린 반성적 태도는 이스트우드의 걸작 중 하나인 ‘그랜 토리노’(2008)와 비교하며 봐야 비로소 대강의 윤곽을 찾을 수 있다.
카일은 ‘그랜 토리노’에서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월트와 조금 겹친다. 한국전쟁 참전 후 겪은 PTSD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월트는 “3년간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검으로 찌르며 살았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다.(카일은 이라크인들을 죽여서가 아니라 동료들을 지켜주지 못해 괴롭다고 말한다) “명령 받고 끔찍한 일을 저질렀지만 고해성사로 마음의 평안을 찾으라”고 원론적인 말만 반복하는 스물일곱의 젊은 신부에게 월트는 이렇게 말한다. “날 계속 괴롭히는 건 명령 받아 한 일들이 아냐.”
두 영화를 겹쳐 봐야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사가 하나 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카일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는 말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지. 자신을 보호할 줄 모르는 양, 폭력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늑대 그리고 축복 받은 공격성으로 늑대에 맞서 양을 보호하는 양치기 개. 양과 늑대가 돼선 안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해.”
월트가 옆집 베트남 소년 타오를 성마른 목소리로 혼내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흥미로운 건 이 지점에서 두 영화가 갈린다는 점이다. 여자친구(양)를 동네 건달(늑대)들이 괴롭히는 걸 보고도 지켜주지 못한 겁쟁이(양) 타오에게 월트는 진짜 남자(양치기 개)가 되라고 말한다. 아들에게 사격을 가르치는 카일과 달리 월트는 타오에게 총을 주지 않는다. 건달들과도 월트가 직접 맞선다. 총이 아닌 달랑 라이터 하나만 들고. 그건 복수나 응징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위해서다.
‘그랜 토리노’가 ‘아메리칸 스나이퍼’ 보다 훨씬 성숙한 영화라는 건 마지막 장면에서 한 번 더 확인된다. 배타의 나라 미국이 아니라 관용의 나라 미국, 기성 세대의 미국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미국을 위하는 늙은 보수주의자의 제스처. 월트는 자신에게 미국인으로서 자긍심과 같던 1972년형 포드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못된 손녀 대신 타오에게 물려준다.
이스트우드의 퉁명스런 노래 ‘그랜 토리노’를 배경으로 타오가 차를 몰고 가는 엔딩 장면은 몇 번을 봐도 찌릿하다. 작곡은 재즈 마니아인 이스트우드가 직접 했다. 독학으로 피아노와 작곡을 터득한 그는 재즈 연주자인 아들 카일 이스트우드와 함께 작곡한 곡을 종종 영화음악으로 사용하는데 이 곡도 마찬가지다. “웨스턴과 재즈야말로 순수하게 미국적인 단 두 개의 예술 장르”라는 그의 말을 웨스턴 장르의 현대적 변형이라 할 수 있는 ‘그랜 토리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밥 재즈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스트우드의 취향은 자신이 만든 음악에서도 잘 드러난다. 차분하고 고전적이다. 월트의 차를 타오가 물려받듯 영국 재즈 음악가 제이미 컬럼이 이스트우드를 이어 받아 노래를 마무리한다. 이스트우드의 목소리엔 “돼먹지 못한 내 가족보다 동남아인들과 더 통한다는 게 말이 되냐”며 투덜대던 월트의 외로움이 묻어난다. 영화의 화룡점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곡이다. 외로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조용히 퇴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얼마나 쓸쓸하면서도 우아한가.
고경석기자 kave@hk.co.kr
영화 ‘그랜 토리노’의 주제가 ‘Gran Torino’ 뮤직비디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제이미 컬럼이 이어 부른 ‘Gran Tor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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