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인 권중면이 받은 서간 세첩… 고문서 전문가 하영휘 교수가 번역
“아드님의 재취(재혼)가 오히려 늦다고 할 만한데 탈상까지 기다리시는 겁니까?”
이런 편지를 며느리의 아버지, 즉 사돈이 보냈다. 조선 말기 고종 때 말이다. 딸이 혼인한 지 몇 년 안돼 죽자, 아버지는 사돈에게 걱정 말고 사위를 새 장가 들이라고 권한다. “좋은 규수가 덕문(德門)에 들어오고 나면, 모든 생활 또한 놀랍게 좋아질 것입니다.”
딸을 그리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아버지는 “한탄한들 무슨 수가 있겠느냐”며 “저절로 목이 메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고 끝맺는다. 구한말의 문인 권중면이 사돈 이병화에게서 받은 편지다. 권중면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였던 권율의 후손으로 호는 취음(翠陰)이다. 서울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겪고는 관직을 그만둔 뒤 계룡산 자락에 들어가 글을 쓰며 살았다.
권중면은 자신이 받은 편지들을 묶어 간찰첩 ‘양몽구독(梁夢舊牘ㆍ꿈 같은 옛 편지들)’, ‘구독부여전(舊牘附餘全ㆍ옛 편지 남은 것 모두)’, ‘구독습유건(舊牘拾遺乾ㆍ옛 편지 빠진 것 모음 건편)’으로 남겨놨다. 이들 편지첩이 ‘구한말 사대부들의 편지’(책미래)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고문서 전문가인 하영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부교수가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 편지 104통과 시 7수가 실렸다.
이병화의 편지는 ‘양몽구독’에 있던 것이다. 이병화는 딸의 생전에도 권중면에게 서찰을 자주 보냈다. 혼인한 지 3년째 해인 1911년 5월과 10월에 보낸 편지에는 “여식은 두드러진 병은 면했는지요? 나이가 어리고 미련하여 걱정을 많이 끼칠 것 같아, 몹시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여식이 미련하고 약한 자질로 어떻게 시봉(侍奉)은 합니까” 등의 말이 나온다. 에둘러 딸의 안부를 묻는 아버지의 마음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편지들에는 구한말의 시대상도 나와 흥미롭다. 1907년 장흥군수 이장용의 편지에는 “공무로 지루하여 말하는 것조차 괴롭다”는 말과 함께 “근자에 경찰서를 설치하기 때문에 매우 어지러워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 같은 해 김우현이 보낸 것으로 돼있는 편지에는 “사패(재판소)에 가서 판결을 구하지 않으면 필시 바로잡기 어려울 것이니 헤아려서 처리하시기 바란다”라는 조언이 있다.
하 교수는 “재판소, 세무서, 경찰서가 만들어짐에 따라 지방 수령의 권한이 분산됐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편지에는 고을을 무대로 날뛰는 무법자나 지방에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마름을 통해 이를 관리하는 중앙 고관의 얘기가 나온다.
하 교수는 “구한말은 멀지 않은 과거이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당시의 편지는 많지 않다”며 “사대부 관리들의 편지가 보관된 권중면의 간찰첩은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이 편지첩들은 서울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됐다. 권중면의 아들인 고 권태훈씨의 제자가 이를 알아보고 사들인 뒤 하 교수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하 교수는 “구한말까지도 글씨는 곧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편지를 소중히 여겨 첩으로 만들어 둔 것”이라며 “100여 년 전 조선 마지막 사대부의 글씨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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