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선지자를 원하고 회의론자를 배격한다. 답 없는 삶이 답답해서다. 신은 만들어졌다. 맹신과 그 후과를 경계하잔 게 다원주의다. 진보 기획 토대다. 한데 왜 욕하면서 닮아가나.
“내가 ‘대답’에 능한 이들을 경계하는 까닭은 우선 재미가 없어서다. (…) 답변 가능한 질문은 언제나 환영하지만 의문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 (…) 오만과 허영, 전능의 강박이 병든 자의식의 형태로 전화한 까닭이라 나는 여긴다. (…) 뭐가 뭔지 모르겠고, 어떤 게 좋고 또 옳은지 혼란스러울 때 선명한 ‘대답’은 매력적이다. 직접 감당해야 할 고민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답이 신뢰할 만한 근거, 이를테면 검증된 이론이나 신망 있는 이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 하지만 돌이켜보면, 확신의 그 유혹적 순간이 실은 새로운 질문이 시작돼야 할 순간이었던 때가 많았다. 인류의 긴 세월을 두고 대답에 가장 능했던 이들은 신이 되었다. 신은 어떤 의문에도 응답해왔다. 신과의 대화에서 얻지 못한 답이 있다면 그건 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잘못 이해한 인간의 책임이다. (…) 그리하여 신의 세상, 신을 추종하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완성된다. 즉 의문이 봉쇄되고(서서히 잊히고) 오직 눈부신 말씀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길은 정해졌고, 우리가 할 일은 그 길이 요구하는 수고와 고통을 불평 없이 의문 없이 감당하는 것 뿐. 나는 그런 천국이, 옳고 그름을 떠나, 도무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 많은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실망스러웠던 이유도, 그 영화가 대답에 능한 이들의 화법을 답습하고 있어서였다. (…) 의문을 틀어막고, 마땅히 제기돼야 할 수많은 질문들이 끼어들 틈조차 봉쇄한, 옹졸하고 오만한 화법이 거기 있었다. (…) 나는 그 영화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몰아가는, 너무 전형적이어서 따분하기까지 했던 대화의 방식 때문에 재미 없었다. 만일 종교의 약속처럼 천국이라는 게 있다면, 그곳은 의문으로 가득 찬 곳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대답으로 타인을 강요하지 않고, 대답을 공유하는 이들로 무리 짓지 않고, 세력을 이루지도 꿈꾸지도 않는 세상. 대답이 결론이 아니라 질문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모든 관계-소통이라 하든 사랑이라 하든-가 수많은 의문들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세상. 궁극의 대답을 믿음으로 공유하면서 모두가 행복한 환한 깨달음의 세상이 아니라, 내 의문을 중시하고 타인의 의문을 존중하는 세상, 회의(懷疑)의 형식으로 연대하는 세상이다. 그것은 ‘대답’에의 본능적 끌림에 저항함으로써 조금씩 다가갈 수 있는 세상일 것이다.”
-‘대답’에 능한 이들을 경계한다(한국일보 ‘편집국에서’ㆍ최윤필 선임기자) ☞ 전문 보기
“인터넷에서 ‘탈김치’라는 말을 종종 본다. ‘김치녀’는 ‘능력도 없으면서 남자 등골 빼먹는 젊은 여성’이다. ‘탈김치녀’는 그런 김치녀에서 벗어난 이른바 ‘개념녀’를 뜻한다. (…) 7년 전, 그러니까 2008년 촛불시위 당시 ‘개념녀’를 자칭하는 말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배운 녀자’다. ‘배운 녀자’는 ‘김치녀’ ‘된장녀’처럼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을 타자화하는 말과는 태생이 달랐다. 그것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참여하는 여성들이 자부심을 담아 스스로를 호명하는 단어였다. (…) 그럼에도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했던 건 ‘그럼 못 배우거나 덜 배운 여자들은 누구지?’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운 녀자’라는 말에서 느낀 불편함은 사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냈던 나 자신에게 느꼈던 불편함이기도 했다. 즉 사회 갈등과 적대의 복잡한 동학을 너무 쉽게 개인의 실존적 계몽의 차원에서만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이다. (…) 오늘날 진보진영 전체가 직면한 인식론적 궁지다. 미국의 이른바 ‘리버럴’, 민주당 지지자들 중 상당수는 “공화당 지지자들은 멍청하고 아이큐가 낮다”는 식으로 조롱하길 좋아한다. (…) 그런 태도는 우리 편에게 우월감을 안겨줄지 몰라도 우리 편이 아닌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정치공학적인 면을 차치하더라도 평등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강조하면서 공동체 구성원의 차이들을 지적 우열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동안 진보는 진보적 개인의 지적·도덕적 우월성에, 혹은 그런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지나치게 기대어 온 게 사실이다. (…) 진보가 세련되고 똑똑하고 도덕적인 캐릭터가 된다면 대중이 자연스레 지지해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 본질적인 문제는 범진보 세력의 자기인식이 ‘계몽의 유아론(solipsism)’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나만(우리만) 계몽되었다’는 생각에 여전히 갇혀 있다. ‘탈김치’ 운운이 자기들만의 ‘상식’과 ‘개념’을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폭력이라면, ‘배운 녀자’라는 말은 타자에게 다른 방식의 각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깨어 있는 시민과, 그 깨어 있는 시민 발목이나 잡는 한줌 운동권과, 아직 정신 못 차린 국민들의 영원한 삼항조로 구성된다.”
-‘배운 녀자’ 그 이후(2월 3일자 한겨레 ‘야! 한국사회’ㆍ박권일 칼럼니스트)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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