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하는 도시 어딘가에 오늘도 가림막이 세워지고 있다. 그 가림막이 걷히고 나면 빌딩이 서고 아파트가 들어서 있을 것이다. 마술 같은 과정을 가리기 위해 세워놓은 가림막은 경우에 따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선택 되기도 한다. 건축주의 뜻이거나 공사장 앞을 지나는 행인들의 욕구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는 공사장 가림막의 변신이 파노라마처럼 흥미롭다.
가림막은...... 광고판이다.
맑고 청순한 시선과 갸름한 목선,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서울 명동 한 복판에서 만난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묘한 분위기로 구매욕구를 자극하는 그녀는 복잡하고 어수선한 공사장을 가리고 서 있다. 명동이나 강남역 같은 번화가에선 대형 의류 매장이나 레스토랑, 카페가 수시로 입점과 폐점을 반복한다. 새로운 매장이 들어서기 전 내, 외부 수리는 필수. 어김없이 세워진 가림막 광고는 고객들을 향해 ‘커밍 순(Coming soon)'을 외친다. 가림막은 적은 비용으로 광고효과를 누릴 수 있는 훌륭한 옥외광고판이다. 광고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가림막에 그려진 큼지막한 브랜드로고나 매력적인 모델에 자주 노출되다 보면 은근슬쩍 개점 날짜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소비자의 환상을 묘하게 자극하는 가림막 광고와 오고 가는 고객들 사이의 밀당은 공사를 끝내고 가림막을 걷어내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가림막은...... 넘사벽이다.
안간힘을 쓰던 그들마저 담장 밖으로 내쫓겼다. 거대한 도시개발 사업을 위해 그 동안 벌어 먹던 구멍가게도 포기해야 했다. 막상 담장 밖으로 나온 다음엔 철거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6년이 지난 지금, 재개발 시계도 멈췄고 공사가 중단된 부지는 도시의 섬처럼 휑하니 떠 있다. 담장을 바라보며 한 숨 짓는 이들도 많아졌다. 구구절절 억울한 마음을 담장에 적어봤지만 박탈감과 무력감은 점점 더 커졌다. 이제는 흔적으로만 남은 구호, 서울 용산역 주변의 담장 앞에선 참사의 아픔도 희망의 끝없는 추락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서울 만리동 고개. 이웃 동네에도 어느 날 5미터가 넘는 높이의 장벽이 쳐졌다. 수십 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장벽이 서기 전 떠나갔다. 장벽 안쪽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설 거라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 이름도 낯선 새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미리 쳐 놓은 장벽은 그 그늘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아닐까.
가림막은...... 게시판이다
1월 29일 대형 공사가 한창인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 정문에서 본관 앞까지 이어진 공사장을 따라 긴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 가림막으로 둘러싸인 통로에서 한 학생은 “원래 탁 트여 있던 공간이었는데 가림막이 쳐져서 답답하다”며 불만스러워 했다.
가림막을 따라 걷다 보니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여러 개의 바람개비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가림막의 빈 공간은 교내 비정규직 노동자 인력감축에 반대하는 구호들이 차지하고 있다. 공사장의 소음이나 먼지를 차단하기 위한 가림막이 누군가의 주장을 표현하고 알리는 게시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학교측은 눈에 잘 띄는 위치의 가림막에 적힌 구호들을 흰색 페인트로 덧칠했다. 한 학생은 “누구나 표현의 자유가 있다. 가림막에 낙서하는 것이 불법이라면 당연히 제재를 받아야겠지만 학교를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학생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수단으로 가림막을 선택하는 것은 좋지만 한 가지 의견만 도배하다시피 채워 넣는 것은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키게 한다”고 말했다.
가림막은...... 갤러리다.
공사 가림막이 작품 전시장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경의선 폐선 구간을 공원화하는 서울 연남동 공사장의 일부. 양 옆으로 길게 이어진 공사 가림막에 알록달록한 그래피티(Graffiti) 작품들이 빼곡하다. 마치 방치된 것처럼 한 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는 가림막은 뒷골목 아티스트들에게 새하얀 캔버스나 다름 없었다.
디자인 작품이 입혀진 공사 가림막은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설 세련된 빌딩보다 먼저 아름다움과 멋을 도시에 선사한다. 입 코 귀를 다 틀어막고 지나쳐야 했던 시끄럽고 지저분한 공사현장이 예술을 만나 ‘아트펜스(Art Fence)’로 진화하는 것이다.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이나 입체 조형물이 툭 튀어나온 아트펜스를 행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바쁜 현대인의 지친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가림막은 거리의 갤러리다.
가림막은...... 삶의 거치대다
가림막 위로 이따금씩 엿보이는 포크레인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건설 장비의 소음과 함께 흙먼지가 쉴새 없이 가림막을 타고 넘는다.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서울 남대문시장 인근의 한 건물 신축 공사장. 임시로 설치된 공사 가림막을 등진 채 파라솔까지 펴고 앉은 할머니 환전상들이 느긋하게 손님을 기다린다.
하필이면 허술하기 그지 없어 보이는 얇은 철제 가림막 앞, 그것도 차도 위에 터를 잡은 이유가 궁금했다. “난 원래 이 자리에서 쭉 장사를 해왔어. 공사 때문에 위험하긴 해도 여기가 내 자리니까 여기 있어야지” 평온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환전상 할머니에게 공사장 가림막은 ‘삶의 터전’이다. 매일 ‘공사 중’인 아슬아슬한 삶을 기댈 수 있는 거치대다.
사진부기획팀=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김주빈 인턴기자(서강대 중국문화과4)
이정현 인턴기자(국민대 사법학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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