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럽지 않던 대기업 과감히 사표, 낙농업·양돈업·학원사업 잇단 실패
안동 전통 먹거리 버버리찰떡 도전, 연간 찹쌀 소비량 1000가마
경북 안동에는 “너무 맛이 좋아 한입 베어 물면 벙어리가 될 정도”라는 버버리찰떡이 있다. 버버리는 벙어리의 안동지역 사투리다. 이 버버리찰떡이 최근 영국의 패션브랜드 버버리와의 한판 싸움에서 승리하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버버리찰떡은 해방 전후를 시작으로 안동지역에서 만들어 먹어온 전통 찰떡으로, 안동시가 2002년 직접 상표등록한 브랜드다. 농업회사법인인 버버리찰떡(대표 신형서ㆍ58ㆍ사진)은 2013년 신제품인 버버리단팥빵을 출시해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출원했지만, 영국 버버리가 이의를 제기하자 특허심판원은 최근 버버리찰떡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신형서 대표는 “버버리는 안동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온 순수 우리말일 뿐이고, 빵 속에 버버리찰떡이 들어 있기 때문에 버버리단팥빵이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라며 “한글 글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순 우리말을 특산품에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국적기업의 횡포”라고 강조했다. 2004년부터 버버리찰떡을 만들어 온 신형서 대표는 이후 안동시로부터 상표사용권을 넘겨받아 명품 브랜드로 육성하는데 성공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견되는 이번 상표분쟁처럼 신 대표의 인생 또한 드라마틱하기 그지 없다. 대기업 직원에서 낙농가, 한우농장, 학원 원장, 돼지농장 주인에 이어 전통의 맥을 잇는 사업가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대한항공에 입사한 신 대표는 학창시절 낙농가의 꿈을 잊지 못하다 2년 만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1985년 낙농업을 시작했다. 부모의 지원을 받아 일직면에 초지를 조성하고 젖소 50마리를 구입했다. “정말 파라다이스였죠. 매일 짠 우유를 납품하고 나면 보름 단위로 대금에 통장에 들어오는데, 힘든 줄도 몰랐어요. 너무 잘 나간 것이 화근이었나 봅니다.” 신 대표는 잘 나가던 당시를 회상했다.
여세를 몰아 진출한 학원업이 ‘크게’ 망했다. 입시학원에다 고시학원까지 벌인 것이 경쟁학원이 잇따라 생기면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강사 20여명, 수강생 1,000명이 넘었지만 하나 둘 줄기 시작해 적자가 눈덩이처럼 늘기 시작했다. 먼저 키우던 젖소를 한 마리, 두 마리 내다 팔아 메웠다. 그래도 모자란 것은 빚을 냈다. 결국 3층짜리 학원건물을 처분하고서야 빚을 갚을 수 있었다. 목장도, 학원도 사라졌다.
신 대표는 “참 막막했습니다. 남들 보기에 민망했고요. 무엇보다 가족 생계가 걱정이었죠”라며 당시 참담했던 상황을 담담히 털어 놓았다.
그는 1995년 안동시가 서현양돈단지 조성을 위해 조합원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지원, 4,000마리까지 불리는 등 승승장구했다. ‘장수토돼지’라는 독자브랜드로 유명 백화점에 납품 하고, 전국 6곳에 체인 판매점을 개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돈업도 구제역 여파로 2002년쯤 접어야 했다.
자녀 대학 등록금조차 마련하기 버거워졌다. 2년 가까이 허송세월하다 손을 댄 것이 버버리찰떡이다. 기능보유자를 수소문 끝에 찾아냈고, 삼고초려끝에 2명의 할머니를 스카우트해 옥야동 신시장 한 켠에 20㎡ 규모의 ‘떡집’을 냈다. 직접 홍보물을 만들어 언론사 등에 전달하며 소문을 냈고, 안동 대표 먹거리로 부활시켰다.
“사실 상표분쟁은 이전에도 있었어요. 두 명 중 한 명의 할머니 아들이 ‘벙어리찰떡’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상표분쟁이 벌어진 거죠. 9번의 재판 끝에 해결됐습니다. 이후 안동시가 등록해 놓은 농업회사법인 버버리찰떡을 우리가 공식적으로 사용키로 했고요.” 버버리찰떡 브랜드에 얽힌 비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버버리찰떡은 요즘 연간 찹쌀 80㎏들이 1,000가마, 팥 30톤, 콩 5톤을 소비한다. 모두 지역 농민과 계약재배를 통해 조달하고 있다. 찰떡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아이스찰떡’을 개발했다. 찰떡을 곧바로 냉동실에 넣어 두면 필요할 때 언제나 굳지 않은 떡을 먹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잇단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것은 가족 때문이다. “두 딸이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에 양돈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아버지로서 해 준 게 없어 정말 미안했다”는 그는 “가족이 있기에 힘을 낼 수 있었고, 하던 일이 실패하면 ‘한쪽 문이 닫히면 그 옆에 새로운 문이 활짝 열린다’는 신념으로 부딪치다 보니 보이지 않던 문이 나타나더라”고 강조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그는 수년째 지역 대학에 장학금을 내고 있다. 또 해마다 수천만원의 자비를 들여 수능기원 합격기원제도 연다. “영국 버버리 측의 태도에 따라 지루한 소송전이 계속될지 모르는 만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우리의 전통을 지켜나가겠다”고 피력했다.
글ㆍ사진 권정식기자 kwonjs57@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