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은 다른 달보다 이틀이나 사흘이 짧기도 하지만, 심리적으로도 짧고 끼어 있는 듯하다. 양력 새해와 음력 설 사이에 끼어 있어 유예된 달 같은 기분마저 든다. 회계 기준 등을 비롯해 공식적인 모든 일정은 1월 1일부터지만, 온전한 새해는 긴 연휴가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하는 3월에 다시 한번 더 시작하는 인상을 풍긴다. 겨울 방학과 봄 방학 사이에 끼어 등교 일이 적은 2월을 12년 이상 지내면서 2월은 적당히 넘어가는 달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태양의 주기를 따라 1년을 따지는 방식과 달의 주기를 따라 1년을 계산하는 전통이 얽혀 있는데다, 이에 따른 학사 일정과 명절 연휴 같은 한 사회의 습속이 더해진 결과다. 이 둘의 차이를 없애려고 양력 새해를 설날로, 음력 설을 구정으로 부르고 쉬는 날 수를 바꾸기도 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주기를 별 불편함 없이 따르고 있다. 그레고리력을 뒤늦게 받아들인 한국과 중국 등에만 서로 다른 두 역법이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오래되었고 중요한 기독교 축일인 부활절이 크리스마스와 달리 매해 다른 날짜인 것이 대표적인 예다. 부활절이 지역마다 다른 사태는 1,700여 년 전에 이미 심각한 문제였고 적당히 봉합했지만, 지금까지도 온전히 양력 체계에 통합되지는 못했다.
최근의 흐름은 양력과 음력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 아니다. 자연의 거대한 순환에 따르는 1년 주기의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대신 같은 하루를 무한히 반복하는 일에 우리의 삶이 맞춰지고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조너선 크레리는 이 현상을 24/7이라고 부른다. 24시간이 7일 동안 반복되는 세계다. 24/365라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는 점에서 1년의 순환과 하루 반복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365는 예기치 못한 일이 끼어들고 무언가가 바뀔지도 모를 만큼 긴 호흡인 반면, 7은 어제와 같은 오늘과 오늘과 같은 내일의 무한 반복이다. 크레리는 경제 활동이 멈추는 잠자는 시간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정복하려는 마지막 영역이라고 진단하며 잠을 몰아내는 미시적, 거시적 시도들을 소개한다. 3일 동안 자지 않고도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임무를 수행할 병사를 위한 약물, 인공위성을 이용해 태양 빛을 반사시켜 어둠을 걷어내려는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법한 방법 등이다.
첨단 기술을 동원한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한국은 지구 어디와 비교해도 24/7이 매끄럽게 돌아간다. 불안정한 고용, 토ㆍ일요일과 휴일에도 중단 없이 이어지는 노동, 퇴근 이후에도 메신저 등을 통한 업무 연장 등 24/7 세계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낯설기는커녕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은퇴한 한 정치인이 “저녁 있는 삶”이라는 매력적인 정치 구호는 한국 사회의 핵심을 짚은 것이었다. 그러나 저녁이 자신의 것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믿는 이들이 대다수이니 저녁 있는 삶을 기치로 내건 정치인이 선거에서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녁 있는 삶의 자리는 매주 금요일은 정시 퇴근하는 “뻔뻔한 날”이라는 어느 대기업의 문구가 차지했다. 저녁은 얼마나 호사스러운 단어인가. 저녁이 사라진 것은 단순히 퇴근 후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쉼 없는 자본의 작동은 미래를 향한 장기적 계획, 진보나 발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몰아낸다. “그림자 없이 불 밝혀진 24/7의 세계는 역사적 변화의 동력인 타자성을 악령 몰아낸 듯 몰아낸, 역사 이후의 최종적인 자본주의적 신기루”이다. 삼포 세대가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는 징후라는 건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하다. 인구의 변동과 성장의 둔화 같은 거시적 변화가 눈 앞에 닥쳤음에도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을 정치권은 방기하고 있다. 야권은 변화의 동력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보이고, 여권은 소수의 이익에 봉사하는 데에만 여념이 없다.
유예된 새해 2월은 새해 계획을 다시 한번 재조정할 기회다. 자기계발 상품으로 인기를 끄는 10년치 다이어리에 한국사회는 과연 계획을 채워 넣을 수 있을까.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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