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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실학, 풍운의 꿈을 보다

입력
2015.02.0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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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개혁 꿈꾸며 우정 나누던

박지원ㆍ박제가ㆍ이덕무ㆍ이서구…

종로 원각사지 10층 석탑 둘러싼

'백탑파'의 발자취 따라가는 전시

'백탑파'의 좌장인 박지원의 초상화(왼쪽)와 박제가의 초상화 서울역사박물관ㆍ추사박물관 제공
'백탑파'의 좌장인 박지원의 초상화(왼쪽)와 박제가의 초상화 서울역사박물관ㆍ추사박물관 제공

“빙 두른 성으로 탑이 그 중앙에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설죽의 죽순이 솟아난 듯한데, 원각사의 옛 터이다. 지난날 무자(1768년) 기축(1769년)년 사이, 내 나이 18,9세 때 미중 박지원 선생이 문장이 뛰어나 당대의 명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탑의 북쪽에 있는 그를 찾아갔다. 선생은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옷깃을 채 여미지도 못한 채 나를 맞으며 악수를 청하는 것이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듯이 하였다.”(‘정유문집’)

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 박제가는 스승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적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탑은 조선시대 한양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던 원각사지 10층 석탑으로 현재 종로2가 탑골공원에 있다. 색이 하얗다고 해 ‘백탑’이라고도 불렸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일대는 18세기 조선에 변화와 개혁의 바람을 불고 온 근원지였다.

물론 박지원과 박제가만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 수는 없었다. ‘정유문집’에는 “형암(이덕무)의 사립문이 탑의 북쪽으로 나 있었고, 낙서(이서구)의 행랑채는 탑의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으며, 수십 보를 더 가면 서상수의 서루가 있었다. 그리고 북동쪽으로 꺾어지면 이류(유득공)의 거처가 있어 내가 한 번 가면 돌아올 것도 잊은 채 열흘이고 한 달이고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고 적혀 있다. 좌장 격인 박지원을 중심으로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이서구 등이 이웃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역사박물관 '탑골에서 부는 바람'전은 18세기 원각사지 10층 석탑 일대에 살며 조선의 변화를 꿈꿨던 '백탑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대중에 처음 공개되는 '탑동연첩' 속 하얀색 석탑이 눈에 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탑골에서 부는 바람'전은 18세기 원각사지 10층 석탑 일대에 살며 조선의 변화를 꿈꿨던 '백탑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대중에 처음 공개되는 '탑동연첩' 속 하얀색 석탑이 눈에 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은 3월 29일까지 ‘백탑파’와 그들이 꿈꾸던 세상 이야기를 담은 ‘탑골에서 부는 바람’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백탑파 구성원들의 인간적인 교류에서부터 중기실학과 이용후생학을 견지했던 이들의 사상적 풍토, 문체반정으로 정조와 백탑파가 겪었던 갈등까지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전시장 초입은 백탑파의 풍류로 채워졌다. “청장(이덕무)이 굶어 죽은들 무슨 상관 있으리 / 죽는대도 시서에선 향기가 날 터인데” “연암(박지원) 선생 문필은 사마천과 한유를 아우르니 / 고금을 섭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네” 박제가는 ‘정유각집’에 “장난 삼아 왕어양의 세모회인시 60수를 본떠 짓다”고 적으며 벗들을 대상으로 한 인물 시편을 실었다. 왕어양의 시를 흉내 냈다는 점에서 사절단을 수행해 네 차례나 중국을 다녀온 그의 국제감각을 엿볼 수 있다. 장가 든 첫날 밤에도 신부를 팽개치고 백탑 주변을 찾았다는 박제가의 일화는 이들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했는지 잘 알려준다.

풍류와 시 짓기를 즐겼던 백탑파지만 이들은 청나라 문물의 이점을 조선에 적용하려 몸부림친 개혁가들이기도 했다. 박지원, 홍대용, 이서구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서얼 출신이었어서 신분제 타파와 성리학 비판에 평생을 바쳤다. “잘못된 시구나 때워주고 밥을 빌어먹는 ‘시 땜쟁이’ 노릇이나 하지”라며 이덕무가 유득공에게 던진 농담은 당시 서얼 출신 문인 지식층의 곤궁한 처지와 성리학에 대한 냉소를 보여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덕무 등 4명의 시를 뽑아 엮은 시집 ‘한객건연집’, 유득공의 ‘경도잡지’ 등을 통해 경직된 조선 사회를 변혁하려고 했던 이들의 열망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정조의 부름으로 규장각에 들어가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은 한양의 모습을 노래한 ‘성시전도시’를 지었다. 백성의 삶에 누구보다 관심이 높았던 이들인 만큼 18세기 역동적인 한양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전시 후반부는 정조의 문체반정을 그린다. 정조는 백탑파의 지원이 절실했던 개혁군주였지만 주자학에서 벗어나지 못한 골수 성리학자이기도 했다.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명말 청초의 문집과 패관소설류, 잡서 등을 부정했는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그 대표 격이었다. 하지만 박지원은 끝내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그 뒤로도 정조와의 인간적인 교류는 끈끈하게 이어졌지만 이 일로 조선 실학의 좌장은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특히 정약용이 연암의 소설 문체를 “음탕한 곳에 마음을 두고 비분한 곳에 눈을 돌려 혼을 녹이고 애간장을 끊는 말”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하면서 탕평과 개혁의 기반이었던 규장각의 신진 세력들도 점차 분열됐다. 결국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조선의 개혁은 대부분 멈췄고 규장작이 대폭 축소됐다. 백탑파 역시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탑동연첩’이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대중에 공개된다. 백탑파의 발자취를 가감 없이 보여주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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